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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스탈린의 죽음(9)|베리야의 최후(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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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베리야를 타도하기 위한 크렘린 권력자들의 공모는 스탈린 사후 4개월만에 성사되어 타스통신은 1953년6월26일에 비로소 베리야와 그 일당 6명이 반역죄로 체포됐다는 것을 공개 보도하였다. 한국휴전이 성립되기 1개월전이었지만 실제로 이들이 비밀 재만을 거쳐 총살된 것은 그해 12월23일이었다.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사망직후부터 손쓰기 시작한 이 모의는 9개월만에 완결되어 가담자들은 한숨 돌렸으나 곧 이어 새로운 권력다툼이 뒤따랐다. 베리야 모살은 그동안 몇 차례 아슬아슬한 고비를 겪었다는 것이 단편적으로 전해졌지만 소련의 다른 극적인 숙청사건과 마찬가지로 공식발표는 짙은 각색과 운색으로 도배질한 감이 없지 않다. 또한 사건경위도 몇 갈래 다르게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54년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이태리공산당 대표단이 전한 것으로 베리야가 MVD(비밀경찰군) 2개 사단과 스탈린 장남인 바실리· 스탈린 공군중장휘하의 공군일부를 가지고 모스크바를 거의 장악, 쿠데타 성공 일보직전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자신에 찬 베리야 의기양양>
베리야는 성사가 다된 것으로 자신하고 의기양양하게 당 간부회의에 참석했다가 불의에 체포됐다는 것이다. 또한 소련의 공식발표와는 달리 베리야에 대한 처형도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미코얀이 직접 권총으로 체포 즉시 사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역시 베리야 타도의 경위나 체포순간의 극적인 모습 등 제일 가까운 진실은 흐루시초프 회고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 중론으로 돼있다.
어쨌든 베리야 모살에서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스탈린 사후의 크렘린 권력다툼이 중세기의 궁중음모와 조금도 다를 바 없으며 서방국가의 정권교체와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는 점이라 하겠다.
그럼 다시 흐루시초프 회고록에서 베리야 체포 전후의 극적인 상황을 살펴보겠다.

<최고회의 간부회원의 포섭공작은 순조롭게 진행됐지만, 아직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그것은 회의에서 베리야의 모든 직책을 박탈한다 하더라도 누가 그를 감금하느냐하는 문제였다. 최근 최고회의간부회의 경호원들은 모두 베리야 심복이었고 이와는 별도로 회의 중에는 비밀경찰들이 늘 별실에 대기하고 있어 베리야는 마음만 내키면 자기부하를 움직여 우리를 체포할 수 있는 것이다.
공직을 박탈당한 베리야가 격노해서 그런 역습으로 나온 공산은 충분히 있었다. 우리는 궁리끝에 군부의 도움을 얻기로 했다. 맨 처음에 우리는 소련방공사령관 모스칼렌코 장군과 5명의 장성들로 하여금 베리야를 구금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내정하였다. 그러나 거사 하루 전에 말렌코프 수상의 의견을 받아들여 장성 수를 주코프 원수도 한몫 넣어 모두 11명으로 확정하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군장성은 크렘린을 출입할 때는 모두 무기를 휴대하지 못하도록 돼있었다. 그래서 제1부수상 겸 국방상인 볼가닌은 거사에 참가하는 장성들이 무기를 작고 들어올 수 있게 주선하는 임무를 맡았다.
우리는 11명의 장성이 최고회의간부회의가 열리는 동안 별실에 대기해 있다가 말렌코프가 신호를 보내면 회의실로 일제히 들이 닥쳐 베리야를 가두도록 계획을 짜두었다. 들디어 거사의 날이 다가와 최고회의 간부회의가 소집되었다.
개회벽두에 말렌코프는 우선 당내 문제를 협의하자고 제안하여 좌중의 찬성을 얻었다. 나는 미리 꾸민 계획대로 말렌코프 의장으로부터 발언권을 얻어 베리야에 관한 문제를 토의하자고 제의하였다. 이때 베리야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다가 기절초풍한 듯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니카타, 무얼 중얼거리지?">
『어찌된 일이야, 니키다, 당신은 지금무어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거지?』 『잠자코 듣기나 해, 곧 싫도록 그 내용을 알게 될 테니까.』 나는 툭 쏘아 붙였다. 나는 베리야의 죄상을 낱낱이 예거하고는 결론에 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베리야의 행적으로 보아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당이 심장을 뚫고 벌레처럼 기어들어 온 출세의 눈이 어두운 자입니다. 이제 그를 단죄할 때는 왔다고 봅니다.』
내 말이 끝나자 불가닌도 발언권을 얻어 대충 내가 한 말과 같은 취지의 연설을 했다. 그 뒤 간부회원들이 차례로 일어나 너드 나도 베리야에게 공격의 화살을 집중시켰으나 맨 나중의 미코얀만은 달랐다. 그는 대담하게도 베리야에게 관용을 베풀 것을 호소했다.
즉 베리야는 우리가 규탄하는 바를 깊이 새겨듣고 스스로를 반성할 것이며 그는 결코 가망 없는 사람이 아니고 아직도 집단지도체제 안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인재라고 극구 베리야를 변호했다.
좌중의 발언이 모두 끝나자 말텐코프는 의장으로서 모든 토의 내용을 종합해서 정리할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도 말렌코프는 마지막 결정적 순간에 이르러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하였다.
미코얀의 열띤 설득 연설을 마지막으로 회의는 갈피를 못 잡고 공중에 동동 떠 있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은채 얼맛동안 긴장된 시간이 흘렀다.
나는 이대로 가다가는 죽도 밥도 안되겠다는 것을 직감하고 말렌코프에게 재차 발언권을 얻어 베리야의 모든 직책을 박탈할 것을 제의하였다. 말렌코프는 아직 흥분에 들떠 있어 내 동의를 표결에도 미처 붙이지 않은채 옆방에 대기하고 있는 10명의 장성들과 연결된 비밀단추를 누르고 말았다. 신호가 가자마자 부리나케 주코프 원사가 제일먼저 회의실로 뛰어들었고, 뒤이어 모스칼렌코와 그밖의 장군들이 들어섰다. 그러자 말렌코프는 거의 모기 만한 목소리로 주코프 원수에게 멸령하였다.

<"손들엇" 주코프 원수가 고함>
『소 연방각료회의장의 이름으로 나는 베리야에게 걸려있는 혐의를 조사할 동안 그를 감금할 것을 당신에게 명령한다.』『손들엇!』 주코프가 베리야를 향해 소리쳤다. 다른 장군들은 베리아가 혹시 덤빌까하여 권총집을 풀었다. 순간 베리야는 손을 뻗쳐 창가에 놓인 자기 서류가방을 집으려고 했다. 나는 재빨리 그의 손을 낚아챘다. 나중에 조사해서 안일이지만 베리야는 그의 서류 가방이나 주머니 속에 권총 같은 것은 지니고 있지 않았었다. 그의 기민한 동작은 단순한 본능적인 조건반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욱고 베리야는 말렌크프 사무실과 바로 이웃한 각료회의 빌딩 안에 삼엄한 무장경호아래 감금되는 몸이 되었다.
일이 이쯤 되었을 때 또 한가지 새로운 문제가 고개를 들었다. 베리야를 일단 체포하는데 성공했지만 앞으로 단죄할 때까지 어디다 구치해 두느냐는 문제였다. 우리는 아직 베리야의 부하가 득실거리는 내무성에다 그의 신병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숙의 끝에 베리야의 구치책임은 방공사령관 모스칼렌크 장군이 맡아 사령부 안의 한 벙커 속에 가두어두기로 낙착되었다.

<감방에 갇혀서도 억울하다 호소>
이제 숨가쁜 순간은 넘겼다. 베리아의 압송이 끝난 것을 확인한 우리들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편 베리야는 독방에 감금되자 연필과 종이를 달라고 청했다. 우리는 토의 끝에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먼 짓을 할지 모른다는 의심도 갔지만 충동적으로 베리야가 자신의 비난받고 있는 사실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베리야는 연필을 받아 쥐자 말렌코프에게 다음과 같은 호소의 편지를 썼다.
『에고르, 자네는 나를 모르나? 우리는 친구였잖아? 어째서 흐루시초프를 믿나? 흐루시초프가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드는 음모에 자네를 끌어들였지?』
그 후에 베리야는 나에게도 몇 차례 쪽지를 보내 자기는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우리는 베리야의 이와 같은 모든 호소를 각하하고 뉘른베르크 나치 전범 재판 때 소련측 수석검찰관이었던 루덴코에게 그에 대한 심문을 담당케 하였다.>
이상이 베리야 모살에 대한 흐루시초프의 기록이다. 루덴코는 3개월여에 걸쳐 베리야를 심문 조사하고는 반역죄로 기소하여 총살형에 처하게 하였다. 소련공식발표에 따르면 베리야와 그 일당 6명의 총살은 1953년 12월23일에 집행했다고 돼있다.
체포 6개월만에 형이 집행된 셈인데 다음의 처형판결문에 나타난 베리야 죄상은 마치 북한의 박헌영 일당 처단의 경우처럼 믿기 어려운 점도 있으나 이것은 공산세계의 정치재판의 전형적인 패턴인 것이다.

<『반 소 응모실현 위해 테러』>
『베리야는 조국을 배반하고 외국자본 이익에 봉사하여 소련국가에 적대적인 배신자들 집단을 결성하였다. 이 음무단은 공산당과 소련정부에 적대하는 범죄적 목적을 위해 내무성 제 기관을 이용하여 권력의 탈취, 스비에트 노동체제의 붕괴, 자본주의와 부르좌 지배 부활을 위해 내무성을 당과 정부의 상층에 두려고 하였다. 베리야 범죄활동과 외국첩보기관과의 접촉은 19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그는 영국첩보기관의 감독 하에 있던 아제르· 바이잔의 반혁명민족주의정부의 비밀첩보원이 되어 배신행위를 하였다.
1920년에는 그루자에서 역시 영국첩보기관의 앞잡이인 그루자·멘쉬비키 정일부의 보안경찰과 비밀접촉을 갖고 그 후에도 체포될때까지 외국첩보기관과의 비밀접촉을 보지 확대했다. 스탈린 사후 소련에 대한 반동제국주의세력의 준동을 기화로 베리야는 그의 반 소적 음모실현을 위한 행동을 강화하고 권력탈취준비를 위해 국가보안성의 중앙· 지방요직에 심복을 앉히면서 성실한 다른 직원은 탄압했다. 베리야는 또한 각 연방공화국내의 민족주의분자를 선동하여 민족간에 불화의 씨를 뿌리고 국내 식량사정을 악화시킬 목적으로 당과 정부의 중요 시책실행을 방해했다. 베리야와 그 일당은 자기의 범죄행동을 위장할 목적으로 자기들 정체를 폭로할 위험이 있는 인사들에게 테러와 탄압을 가하였다.』
◇주요일지(1952년4월29·30, 5월1·2일)
※29일 ▲휴전회담 완전휴회 ▲이 대통령, 나토 사령관으로 영전하는 리지웨이 대장에 축전
※30일 ▲미그 6대 격추, 4대에 손해 ▲국부행정원, 중·일 평화조약 승인
※5월1일 ▲공산군, 전전선서 5천6백발의 포탄발사 ▲한국공군, 평양·해주 폭격 ▲동경 메이· 데이 행사 수라장, 사상자 1천1백여명
※2일 ▲휴전회담본회의 재개 ▲일본기자 6명, 처음으로 휴전회담 취재 ▲버마 배부의 잔존국순방 활약 ▲아이크, 타토 회원국순방하며 이임인사
※알림=『스탈린의 죽음』은 다음회로 끝내고, 10월2일(월)부터는 『피어린 산과 언덕』 이란 제목으로 휴전회담 때의 『고지쟁탈전』을 다룰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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