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0) <제자 이혜봉>|<제27화> 경·평 축구전 (5)|최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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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평양서의 1차전>
경성군의 「멤버」는 바로 전회에 밝혔거니와 준비 위원회 구성 (1933년3월28일)과 정식 창단 (33년5월11일) 사이인 4월6일부터 10일 사이에 평양군은 창단 준비 중인 경성군을 평양에 불러 경·평전을 치렀다.
그러니까 1929∼30년의 경·평전이 조선일보 주최였는데 비해 이번에는 평양군이 주최가 되어 치른 경·평전이라 하겠다.
경성군은 전회에도 말한 것처럼 이영민이 주축이 되어 서울 관훈동 부자인 배석환을 전주로하고 대회 활동의 인물들은 당시의 중앙일보사 사장인 여운형씨를 모셔 이사장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이영민 자신은 그해 10월에 가서는 감독 겸 선수로 활약했다.
그런데 창단 준비 과정의 경성군 선수 중에는 연전 출신의 이영민과 동년배로서 보전을 졸업한 김원겸이 있었다.
이 둘 사이는 뚜렷한 이유가 없이 항상 사이가 원만치 못했다. 연전과 보전이 그때도 서로 아옹거리는 사이였기 때문에 이 두사람도 서로 매사에 대립되었다는 얘기가 있었는가 하면 성격의 차이에서 그렇게 됐다는 말도 있다.
어떻든 경성군이 창단을 서두르는 과정에 평양군에서 초청장을 내니까 경성군이 이에 응할 뜻을 표명해 왔다.
이 때의 경성군 「멤버」는 감독에 김규면 (조선 체육회 상무), 주장에 김원겸이었다.
김원겸이 주장을 맡아 실질적으로 「팀」의 일을 보게 되니 이영민이 좋아할 리 없었다.
이영민은 빠진 채 경성군은 4월4일에 평양으로 왔다.
지금도 스포츠 대회에는 신문사가 주최하거나 후원하는 것처럼 선전을 위해 신문사의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내가 잡은 것이 조선중앙일보사의 평양지국이었다.
우리 평양군은 중국 천진으로 원정 가기에 앞서 지금의 표현으로 하면 실력 평가전도 하고 원정 경비도 벌기 위해 이 경·평전을 마련했다고 기억이 난다.
어떻든 이렇게 해서 3년만에 부활된 경·평전은 4월6일 하오 4시40분부터 기림리 공설운동장에서 제1차 전을 맞게 됐다.
입장료는 어른·학생 할 것 없이 10전 균일로 했는데 첫날은 5천명의 관중이 모였다.
「게임」은 무오단 출신의 김윤기가 주심을 봤는데 전평양은 전반 9분만에 「페널티·킥」을 얻었으나 이정식이 실축하는 바람에 득점치 못했다.
그러나 27분만에 다시 얻은 「페널티·킥」을 박의현이 성공시킨 다음 잇달아 김성우이 그 큰 몸집으로 무섭게 「롱·슛」한 것이 「골인」 되어 2-0으로 앞섰다.
이 때 평양의 관중들이 발을 구르며 좋아하던 모습은 근 40년이 지난 오늘에도 뇌리에 선하다. 그러나 전반 5분을 남기고 평양은 2「골」을 뺏겨 어이없게 2-2가 됐다.
내가 본 그때의 경성군에는 공격진의 「레프트·윙」에 채금석, 「레프트·인사이드」에 최성손, 「레프트·하프」에 김용식, 「라이트·하프」에 강영필이 섰는데 이미 그때 「숏·패스」의 묘기를 보여 왼쪽 공격은 퍽 예리했다.
전반에 넣은 「골」도 이 왼쪽 공격을 막는다고 바른 쪽이 비는 바람에 경성의 RW 박영환, RI 강영필이가 얻은 것이다.
후반에 들어서도 경성군은 사기가 충천했는데 평양군은 어쩐지 움직이는 것이 둔했다.
그런 틈을 타서 LW 채금석이 경성의 「오토바이」라는 별명 그대로 라인을 타고 잽싸게 공을 몰고 가 「센터링」을 하자 강영필이 다시 차 넣어 전세는 3-2로 역전됐다.
나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독전했지만 그날 따라 경성의 GK 이혜봉이 어찌나 잘 막아내는지 우리 평양은 끝내 3-2로 지고 말았다. 2차 전은 비 때문에 하루 연기되어 8일에 벌어졌다. 평양이 1차 전에 졌다는 소식은 평양 시내에 쫙 퍼져 2차 전에는 관중이 첫날의 두 배인 1만여명이 몰렸다. 시내의 상점은 전부 문을 닫아 완전히 철시 상태였다.
그 당시는 「골·키퍼」를 「차징」하다 보면 「골·라인」을 넘어 골인되는 수도 있어서 이 2차 전에서는 주심·선심 3명 말고도 문심이라 해서 2명이 추가됐다. 지금과 비교하면 우스운 얘기지만 그만큼 그 때는 축구에 대한 열의도 있었고 게임에 너무 열심 하다 보니 과열해져 와일드하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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