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심은 한국의 얼 백제인 박사 왕인의 위업(5)-후예들의 업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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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왕인의 훌륭한 업적을 이어받은 그의 후예들은 고관대작으로부터 농공민에 이르기까지 각계에서 눈부신 활약상을 기록했다.
그리하여 비단 문화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치·경제·기술·불교 등 각 분야에 있어서 왕인 및 후예들이 이룩한 성과를 빼놓고서는 일본 고대사를 논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다 고구려·신라 출신과 기타 유민들이 「왕인 체제」를 중심으로 융합하고 혼연일체 화하여 고대 사회발전에 그 더욱 큰 업적을 쌓았으므로 「왕인 후예」란 곧 영예로운 호칭이었다.
왕인의 후예들은 주로 하내국 고시군(지금의 대판부 하내군)을 본거지로 삼고 남으로 북구주부터 북으로 경도에 이르는 일대를 활동 무대로 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일본 정부가 당시 섭진 남부로부터 하내지방을 유력한 정치적 거점으로 하여 응신·인덕 두 황족의 궁성으로 정하였었다. 다시 5세기 후반부터는 이 지방이 충적지개척 때문에 매우 주목을 받았었다.
또한 한반도의 남부와도 교통이 빈번하였던 뢰호 내해의 항로이며 당시의 대외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길목이었다. 대화로 가는 통로로서도 하내 지방은 정치적·문화적 가치를 충분히 고려할만하다.
하내국과 대화국고시군은 일본 고대 국가 형성의 핵심지. 여기에 집단 정착한 관계로 파상계도의 「성씨록문」에 고시 군이 당초엔 「금래군」이라 불렀는데 뒤에 고시 군으로 고쳐졌다는 것도 매우 흥미 있는 암시이다.
『본래 고시 군은 「신래군」이라고도 부론 지방이었으며 이곳에는 아직도 「이마끼」<금래(목)>의 신까지 모시어 있다』고 한다.
그밖에도 한국 남부에서 왕래하는 사람과 이주자가 많으므로 제2의 한국을 방불케했다는 것이다.
지금의 대판부를 중심으로 하여 동경도 근교와 경도·나량 등지에서는 아직도 그들의 유적을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후미노비도」(문수씨) 들의 조상인 왕인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위업을 전승한 자는 하내국에 정착했던 그의 후예 「가와찌노후미」(서문씨)였다. 그러나 왕인을 시조로 한 씨족은 결코 하나만이 아니었다.
서씨에는 고대에 있어서도 두 줄기가 있는데 하나는 「야마도 노아야 노아다이」(동한직)라 칭하여 황거동에 있는 대화국 고시군 회예촌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서쪽에 자리잡고 있어서 「가와찌노후미」(서문씨)라 칭하여 본관이 하내국이다.
그런데 뒤에 「서」를 「서」씨로 개칭하고 다시 「문기촌」으로 고쳤다. 그러나 이두 성씨는 한 혈연임에 틀림이 없다. 고사기 및 일본서기의 응신천황조에는 「고왕인자시서수등지조야」라고 하여 서문씨가 오히려 본가임을 밝혀주고 있다.
바꿔 말하면 「서문씨」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씨족이 팽창하여 분화함에 따라 분기 씨족을 내게 되는 것이리라. 「시조」의 전승할 「문수」급만 하더라도 6개 씨족에 달한다고 「속일본기」 보구원년(서기770)조에 기록돼 있다.
즉 이와 같이 왕인의 후예 씨족으로서 「서문씨」계의 성씨는 서문·무생·장·선·진·갈정(정상광정의 「왕인 후예 씨족과 그 불교」참조).
이들은 대화조정의 문필과 외교·군사 등 각 분야서 활약함으로써 정계에 미치는 영향도 막대하였음은 충분히 납득되는 일이다.
일본 정계의 모 인사의 말에 의하면 왕인 후예는 전국에 걸쳐 5백80여만 명(명치 초기 추산)이나 있다는 것이다. 이 숫자는 과장된 것이 아니고 고대로부터 주로 문화 지도자의 역할을 해오는 관계로 관공직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고관대작도 많이 나왔고 불교계에도 진출해 도소·자훈·경준·반련 차마 등과 같은 유명한 승려가 속출하였다.
정계와 실력자에도 무시할 수 없는 수이며 경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의원의 모 중진 의원도 그 후예라 한다.
근위내각 당시의 진법무대신이 기옥현 고려촌 출신이고 동향무덕 외무대신도 구주 동향촌 출신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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