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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요인…그들의 「현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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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6면

한국대표단 및 기자단 일행은 평양체재 4박5일 동안 한정된 사람들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그 「한정된 사람들」속에는 북한의 요인도 여러 명 끼여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만난 몇몇 북한 요인들은 안내원 등 하급 기관원과는 달리 말도 행동도 비교적 자연스러워 보였다.
31일 하오 북한 내각 초대소에서 갑자기 예정에 없던 만찬에 한국 대표들을 초대한 북한 제2부수상 박성철은 「파티」에서 『서울 갔을 때 마신 백학소주가 좋았다』고 말하는 등 만찬에 나온 다른 북한 전임상(장관에 해당)들보다 훨씬 풍부한 「제스처」로 우리 대표들을 접대했다.
일본에서 대학을 나오고 연안에 가서 최용건의 부하로 공산주의 운동을 했다는 박은 8·15 해방 때 돌아와 김일성의 직계 부하가 되어 공산당 조직에 참가했다는 것이며 지금은 김의 신임이 두텁다는 것이다. 6·25때는 인민군 제15사단장으로 한국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북한에서 서열 제4위인 박은 7·4공동성명에 앞서 서울에 왔다갔으며 외교부문의 실력자. 그는 그때처럼 『대접을 못해 미안하다』고 하는 등 「조크」를 곧잘 했다. 머리는 반백.
이 만찬 때 처음 나온 김중린은 자그마한 키에 날카롭게 생긴 인상. 직책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 겸 당중앙위원회 비서로서 서열 9번, 대남 공작의 총책을 맡은 실력자로 알려졌다.
그는 북측 중앙상무위원, 노동당 중앙위원회 행정부장 등을 지냈는데 해방 전에는 민족해방동맹소속 공산주의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중린은 만찬에서 우리측 김준엽 자문위원과 이야기하다 신의주고보 동창인 것이 밝혀져 30년만에 해후했다.
또 이 자리에 있던 윤기복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과학교육부장이란 요인. 만주 태생으로 소련에서 공부했다는 것이었고 54년에 인민경제대학 교수를 지낸 것을 비롯, 보통교육장 재정상 등을 지내 실질적으로 북한어린이들의 사상 교육을 맡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형섭도 만주서 태어나 북간도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소련에서 대학을 나왔다고 했다.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후보위원 겸 비서로 사상 교육의 총책인 양은 그 동안 최고인민회의 대의원(62년)·고등교육상(67) 등을 지냈다는 것이며 실권서열 13위에 든다는 것.
북측부단장으로 나온 주창준은 59년에 군사정전위원회 북한 총 수석대표로 나왔던 인물. 67년에 「버마」주재 북한 총영사를 거쳤는데 중국에서 대학을 나왔다는 것이다. 키는 자그마했지만 야무진 표정이었다
북적 위원장인 손성필은 김일성 대학의 경제학 교수를 했다는 정도밖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대표단 일행이 평양 대극장에서 『피바다』를 관람할 때 대표단 근처자리에 앉았던 이기영은 월북작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이는 1923년에 「개벽」 잡지에 단편소설이 실리면서 문단에 「데뷔」했던 사람이다. 대표장편 『고향』으로 잘 알려진 그는 충남 천원군 목천 출신으로 월북 문인으로는 가장 오래도록 명맥을 유지한 사람중의 하나로 알려졌다.
6·25 동란전 서울대 공대교수로 있던 이승기는 전남 담양이 고향. 해방 전 「비닐론」의 생산화를 「합성1호」라는 논문으로 발표, 학계를 놀라게 한 사람인데 북한에서도 과학발전유공자로 우대를 받는 편이어서 지금은 과학원(학술원격) 부원장으로 있다고 한다
또 해방 직후까지 연세대학교에서 경제사회사교수로 있던 백남운(전북 고창 출신)은 지금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의장, 과학원 원사로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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