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석 한적 수석대표 본회담 개회연설 요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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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27년이라는 긴 세월을 두고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동포형제가 한자리에 마주앉게 된 이 감회와 기쁨을, 우리는 우리들 조상 영전에 자랑스럽게 고하면서 기어이 열리고야 만 이 첫 회담의 역사적 순간을 지금 우리는 5천만 겨레와 온 인류 앞에 떳떳하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본인은 남녘 3천5백만 동포들의 마음속으로부터의 안부를 이곳 동포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하며 아울러 이 뜻깊은 사명을 본인이 맨 처음으로 전할 수 있게 된 것을 다시없는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본인은 또한 이 자리를 빌어 대한적십자사와 우리 대표단을 대표하여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을 이곳 평양에서 개최함에 노고를 다하신 손성필 위원장을 비롯한 관계제위에게 심심한 감사의 뜻을 표하며 또 우리 대표단 일행을 따뜻이 맞이해 주신 여러분들의 친절에 대해 기쁜 마음을 금치 못하는 바입니다.
대표 여러분! 우리들은 이 자리에 각기 갈라져 앉은 남과 북의 대표이기보다는 민족과 역사 앞에 민족적 과업을 수행할 역군으로서 영예로운 회담에 임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데올로기」와 「체제」는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지만 민족은 영원한 것이기에 먼 후대에 오늘의 남북적십자회담은 과연 적십자인들로써 슬기롭게 진행되었고 그 성과가 끝내는 조국통일을 위한 보람찬 초석이 되었다고 길이 길이 새겨지도록 우리는 다같이 경건한 사명의식과 민족적 자각으로 이 회담을 진행해야 할 줄 압니다.
역사적인 오늘의 이 회담을 열기 위한 예비회담이 쌍방의 성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만1년이라는 세월을 필요로 하였다는 그 사실이 무엇보다도 잘 입증하듯이 27년이라는 오랫동안의 단절상태가 낳은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현실로서 우리 앞에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 못할진대 우리는 본회담 당사자로서 이와 같은 현실을 솔직히 인식하면서 더욱 차근차근히 맡겨진 문제들을 풀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남북간의 장벽을 허물어뜨리는 것 이상으로 더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당면과제를 성취하기 위하여서는 그 목적과 명제를 설정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를 성취하려는 그 과정에서의 상호협조의 노력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본 대표는 예비회담에서 합의 채택된 목적과 명제, 즉 본회담의 의제들을 성취하기 위한 그 토의과정에서의 상호노력의 기반으로 삼을 우리들의 본회담에 임하는 기본자세에 관하여 소신을 밝히고자 합니다.
의제들은 우리 동포들의 간절한 소원을 집약한 것이며, 또한 밖으로는 제18차에서 제20차에 이르는 적십자국제회의 결의의 정신을 반영시킨 내용이기도 한 것입니다.
본회담에 임하는 우리의 기본자세로서 본 대표가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무엇보다도 우리 쌍방 대표단은 적십자인의 입장을 굳게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귀 적십자회 대표도 이미 판문점 예비회담에서 『쌍방 적십자단체들의 임무로 말한다면 헤어진 가족과 친척들의 고통을 덜어주며 끊어진 겨레의 핏줄을 잇는 사업보다 더 큰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라고 천명한 바 있습니다.
이 회담이 그와 같은 적십자 본연의 사명과 임무에 충실하고 인도주의정신에 입각하여 사업을 추진할 때 회담의 전망은 더욱 밝아질 것입니다.
27년간 겪은 쓰라림을 가능한 일부터 하루라도 속히 덜어주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4반세기동안 단절되었던 남북의 대화가 적십자정신을 통하여 이어져온 도정에서 우리 민족은 지난 7월 4일 역사적인 「남북 공동성명」을 맞이하였습니다.
이 7·4「남북 공동성명」은 4반세기동안 갈라졌던 남북 사이의 오해와 불신을 풀고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자는 남과 북의 기본적 입장을 뚜렷이 하였습니다.
평화적 조국통일의 원칙을 확인하고 남북간의 긴장을 완화하여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서로 상대방을 중상·비방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이 공동성명의 정신이 남북적십자회담에서는 물론 장래 모든 경우에도 받아들여지고 또한 준수되어야 할 것입니다.
남북적십자회담의 기본정신도 이에 상응되어야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할 나위조차 없는 것입니다. 여하한 방식이건 결과적으로 「민족적 대단결」을 해치는 중상·비방은 민족적 수치를 초래하는 이외에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난관이 있어도 5천만 겨레에게 다시는 실의와 낙망을 주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대표 여러분!
우리는 비록 오랫동안 남북으로 갈라져 살아왔지만 같은 말, 같은 역사 그리고 같은 피로 이어져 온 동포인 것입니다.
추석과 세시마다 혈육을 잃은 무덤만이 쓸쓸하게 늘어가고 고향을 잃은 젊은이들, 이제는 인생의 황혼 길에 서서 부모와 형제를 생각하며 울부짖고 있습니다. 이 슬픈 사연과 괴로움을 지닌 안타까운 심정에 우리들은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대표 여러분!
우리는 용기와 인내와 지혜와 호양으로써 이제 이산가족들의 슬픔을 기어이 지워줄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합시다.
본인은 다음과 같이 제청하면서 본인의 연설을 끝맺으려고 합니다. 『남북적십자회담에는 「승리」와 「패배」 「득」과 「실」이 없으며 단지 역사와 민족 앞에 서로가 얼마나 충실한가 그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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