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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밀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서쪽으로 흘러오던 대동강은 대성산을 지나서 부터는 방향을 남쪽으로 잡아 직경이 60∼70리나 되는 넓은 야를 아래로 질러 내려간다. 이 강의 서안에는 몇 개의 구천이 강을 따라 올라가고 있는데, 서기산·산정현·남산현·만학대의 순서로 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러한 구릉들을 덮고서 이루어진 것이 바로 평양시가이다.
고구려때에는 이러한 구릉마다 왕궁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전체에 집이 들어서있기 때문에 시가지 안에서는 그것이 구릉인지를 느낄 수 없을 정도이다.
만장대에서 강을 따라 북쪽에는 구릉의 수준을 넘어 산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도의 것이 솟아있는데, 그 끝에 을밀대가 있고, 그 뒤쪽에는 곧 계속하여 모단봉이 있으며, 이 부근에는 명승고적이 많이 있어서, 평양으로 하여금 절경을 이루게 한 곳이 바로 이 지대이다.
시내에서 을밀대로 가는 길은 경상으로 되어 있다. 강변에서 산을 따라 올라가면, 서쪽으로 옛날의 숭인상업학교와 관악묘가 있고 청류벽위를 거쳐 저수 「탱크」를 지나고 나면 을밀대에 이른다. 여기서 서쪽으로 들아 내려오면 집랑시대의 귀중한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는 평양박물관이 있고, 다음에는 고전장으로 유명한 칠성문이 있다. 그러고 다시 시가지로 내려오면 숭인상업학교 서쪽에 옛날에는 평양신사가 있었다.
국어학자들의 풀이에 의하면 「밀」은 「용」이라는 뜻이고, 「아랫밀」에 대하여 「윗밀이」을 음을 따라 한자로 표시하면 「을밀」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상룡」이라는 뜻이겠지만, 풍수가가 아닌 탓인지 별로 용의 모습을 느껴보지는 못하였다.
을밀대와 모단봉은 지척지간이지만, 그 사이에는 깊은 골짜기가 있으며, 그 밑바닥에 현무문이 있다. 이 문의 서쪽이 기자림이고, 동쪽에는 영명사·부벽루가 있으며, 전금문을 거쳐 대동강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서 강을 따라 준류벽밑을 남하하면 다시 관악묘가 있는 쪽으로 오게된다.
모단봉에는 최승당가 있으며 평양이라고 하면 곧 모란봉을 연상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평양사람들은 이 곳보다도 을밀대를 더 많이 찾는다. 그것은 여기가 더 경치가 좋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고려의 김황원이가 「대야동두점점산」이라고 시로 읊은 평양의 풍치를 가장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곳은 바로 이 을밀대이며, 정해도 상원부근의 연산을 동쪽으로 가마득하게 바라보고, 리 거리의 용악산을 서쪽으로 내려다보면서 광활한 공간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을밀대이다.
나는 어렸을 때 아침마다 이 을밀대를 찾는 것이 나의 일과가 되어 있었다. 을밀대에 올라가 아침해가 뜨는 광경을 보지 않으면 그날 하루의 밥맛이 없을 정도로 나는 을밀대를 즐겨 찾았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침에 기자림속에서는 수많은 청년들이 발성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평양에서 많은 음악가와 가수들이 배출된 것은 이런 데에도 그 까닭이 있지 않았나 생각이 된다.
해방되던 해의 3월에 잠시 평양을 다녀오는 길에 나는 마지막으로 을밀대를 찾아보았다.
그후 27년 동안 나는 평양의 다른 곳은 다 잊어도 이 을밀대만은 잊을 수가 없었다.
이제 머지않아 다시 을밀대를 찾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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