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제26화 경무대 사계 여록 내가 가는 이 박사(16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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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조각과 한민당>
여론은 이 박사가 사람을 잘못 썼다는 편으로 기울어져 있다. 혹은 자기 마음대로 객관성 없이 마구잡이라는 말도 있다. 인물선정에만은 줏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박사처럼 대인태도에 신중했고 사람 들이는 데에 신경을 쓴 이가 드물었다. 그는 늘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일의 성패가 결정된다』고 했었던 것이다. 다만 그를 둘러싼 한국적 정치풍토가 그의 인격이나 생각, 또는 대인지수를 상회하여 그를 끌고 들어가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그가 인물선정에서 가장 심각하게 실패한 것은 이기붕을 유일 최고인으로 곁에 끌어올린 점에 있었다. 그러나 그가 단독으로 판단하여 이기붕을 끌어올렸다고 생각한다면 그처럼 죄가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자기의 개성에 맞는다고 해서, 또는 자기가 좋아하는 「타입」이라고 해서 사람을 쓴 경우가 없었다. 못나고 무능한 사람을 잘나고 유능한 사람이라고 당하는 주변의 풍토를 그의 단순한 대인 태도로서는 간파하지를 못했던 것이다.
건국 후 첫 총선이 끝나고 국회가 형성되어 의장으로 뽑히자 이 박사는 10대부터 나라만을 생각하고 구국의 염 하나로 살아온 까닭에 건국을 눈앞의 현실로서 맞을 적에 가슴이 벅찼었다.
사람들이 가고 단둘의 시간이 되면 그는 말버릇처럼 『백범이 잘 있겠지』하고 김구 주석을 생각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조각이다 뭐다 하는 것에 앞서 그는 건국의 감개무량함을 애국동지와 같이 누리고 싶었던 것이다.
어느 날 이화장에서 윤석오 비서가 왔다. 조각의 추천명단을 내라는 것이었다.
평소 의논하던 것을 써내라니 우습게 생각도 되었으나 그만큼 그는 신중하였다. 나에게만 이런 하명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명단을 적어 가보니 너 댓 명의 쪽지를 펴고 있었다. 이미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고 돌고 돌아 거의 엇비슷한 조각 안 들이었다. 나는 이 박사가 선정하기 편하도록 각 부에 2명씩 추천했다. 김도연 이인 조봉암 전진한 이청천 이범석 유진오 김동성 백악준 윤석구 등등으로 본인들에게는 후일에까지도 알리지 않고 천하였다.
나 자신은 국회를 지키는 편이 좋겠다고 여러 번 그와 의논이 되어 있었다. 물론 각 정당단체의 국회의석 비중을 고려한 조각이어야 했다.
무소속이 80여명이었고 독립 촉성회가 50여명으로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뚜렷한 정당은 한국민주당이었다.
나 자신도 중구에서 당선된 한민당원이었다. 그런 까닭이 아니라도 한민당에서 많은 각원을 차지할 것은 당시의 인물형편에서 어쩔 수 없었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총리였다. 나는 조만식씨와 김성수씨를 썼었다. 조만식 선생은 남쪽에 현존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김성수가 선택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인촌은 한민당의 주역이기도 했지만 이 박사도 가장 아끼는 국내인물이었다.
그는 모나지 않고 급하지 않으며 원만 신중한 편이었다.
그를 총리로 앉히는 것이 건국초기의 안정에도 유익하거니와 이 박사의 정치적 영도력에도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했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의견을 주로 참작하면서도 총리인선만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김성수를 재무에 정해놓고 총리에는 조만식으로 굳히고 있었다. 그는 조만식 총리에 정치적 배려 이상의 큰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다.
수백만의 월남동포와 38이북의 국토에 대한 생각이 조각에 앞서 그의 머리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이름만이라도 조만식을 총리에 앉힘으로써 대한민국이 반 조각의 정부가 아님을 보여주고 싶었고 광복정신을 구현하는 뜻이 된다고 역설했다.
김구 주석이 남·북 협상으로 토라지지 않았다면 그는 마땅히 그를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김성수나 한민당에서는 총리자리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했다. 김성수에게 재무를 맡긴다는 자체가 한민당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얘기였다. 한민당은 건국의 1등 공신이며 이 박사에게는 지대한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면이 있었다.
이런 한민당의 주장과 이 박사의 생각에는 몇 가지 점에서 현격하였다. 첫째, 그는 미주의 정치풍토에서 알고있는 상식으로 총리와 재무로 인식하고 있었다. 대통령중심제가 아니면 건국 초의 정지가 어려울 것인데 그러한 대통령중심제에서는 총리란 한껏 비서역할에 불과하며 재무야말로 건국작업의 기초가 된다고 역설했다.
그는 국가재정과 대미관계를 매어서 생각하지 않았다. 김성수 같으면 그러한 관계를 충분히 잘 해나갈 인물이며 국내의 산업이나 금융문제를 다룰 인물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한민당이 절대다수의 국민지지를 받을만한 명분 있는 정당이 아니라는 의견도 숨기지 않았다. 그가 큰 몫으로 보고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정당의 정치적 영향력이나 역량보다도 임정이나 광복운동단체였다.
그가 국회의장에 당선되었을 때 대한민국은 상해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했고, 3·1정신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한 점은 조각에도 그대로 반영되어야 했다. 총리란 자리는 명예직이기 때문에 그러한 정신적 의미를 부각해야 된다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김성수의 재무지명은 일언지하에 거절되었다. 이 박사와 한민당이 어긋날 이유는 생리적으로 있어왔으나 김성수의 재무지명으로 결정적인 파국을 초래했다.
이 박사는 아무런 정치적 사심이 없었다. 한민당은 그러한 이 박사를 이해하질 못했다. 인촌은 이 박사의 뜻을 알고있었으나 한민당은 그가 재무를 거절하도록 했다.
결국 한민당과 이 박사의 뜻밖의 괴리에서 이 박사의 정치적 파란도 원인하지 않았는가 반성된다. <계속> [제자는 윤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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