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5)(제자 윤석오)|(제26화)내가 아는 이박사 경무대 사계 여록(16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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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신탁통치안>4대국이 한국을 신탁관리 하겠다는 소식은 해방의 해가 넘어가기 전에 전파되었다. 우익계의 정당·사회단체는 물론 미군당국에서도 임정의 법통론이 한창 무르익어 경교장과 한민당은 독립의 꿈에 부풀어 있을 때이다.
좌익계의 인민 공화국파가 한국의 독립을 방해할 것이라는 「하지」의 성명에 한가닥 고무를 느끼고 있었다.
경교장에서는 남북통일을 위한 좌우 협력의 구체안도 마련했다는 특별 발표를 했다.
이 무렵 이 박사는 그 특유의 침묵을 지키며 두문불출이었다.
정권이 임정으로 기울어지자 모두 임정 쪽으로 발길을 들리는 듯했다. 매달 5만원씩 생활비 조로 보내 오던 한민당의 후의도 고르지가 못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이 박사 중심으로 됐다 해서 임정의 독립 추진에 비협조적이라는 일부 비난까지 들렸다.
이 박사는 정치엔 인내와 절도가 중요하다고 독백처럼 말하곤 했다.
그는 독립의 길에 어려운 암초가 있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늘 미 국무성의 정책에 불만이 있었고 그 우유부단하고 현실 기피적인 태도가 마땅치 않았었다. 그러나「모스크바」의 3상 회담에서 신탁통치안이 나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었다.
국내의 여론은 다시 3·1운동을 방불케 하는 일대 시위로 들어갔다. 신탁 문제에는 좌우가 없었다.
이 박사는 침묵을 깨고 결의를 표명했고 김구 주석도 전 민족의 투쟁을 촉구했다. 좌익계의 인민당과 공산당에서도 공식으로 반대 의사를 발표했다. 여운형이나 박헌영 등은 역시 영리해서 이여성이나 조두원 등의 이름으로 신탁 반대를 부르짖었지만 거족적인 투쟁으로 들어간 것만은 틀림없었다. 「하지」장군은 신탁안을 3상회담 도중에 알았고, 「번즈」국무장관과도 만나 훈령을 받았음에도 공표를 꺼리고 있었다.
거족적인 궐기가 심상치 않자 이 박사를 찾아와 새로운 정책을 설명하고 협조를 당부했다. 이 박사는 「하지」뿐 아니라 당시의 미국 정치인들이 전혀 정치를 모르고 역사를 내다보는 눈이 어둡다고 비난해 왔었다. 「하지」로서도 이 박사의 묵살 태도 때문에 정치 이야기를 진전시키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 박사 설득이 어렵자 「하지」는 군정청으로 인민당과 공산당을 필두로 한민당·국민당·신한민족당 등의 대표를 불러 신탁통치의 목적과 내용을 밝혀 찬동할 것을 종용했다. 신탁이란 미·소 양국이 공동위원회를 열어 각 정당 단체로 하여금 임시 정부를 새로 조직하게 하고 그 조직 내용을 미·소·영·중의 4대국 위원회에 제출, 승인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이 박사는「하지」보다도 미 국무성과 미국 여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워싱턴」에 있는 교포들에게 독립운동이 곤란한 문제에 부딪쳐 있음을 타전했다. 미 극동사령부에는 물론 미 정치가들에게도 개별적으로 신탁통치안이 그릇된 것임을 역설하고 미국 정책 당국의 무지를 비난했다. 「워싱턴」에서도 일대 반대 시위를 하고 미군정에 근무하던 한국인들도 모두 사직해 버렸다. 좌우의 정당 단체들은 거의 빠짐없이 경교장 회의에 모여「신탁통치 절대 반대 국민동원위원회」를 구성하고 미군정에 대결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때의 고하 송진우의 일장 연설은 발군의 고견으로서 우리를 감명케 했다.
그러나 신탁 반대를 내걸었던 조선공산당과 인민당 등은 사흘이 채 가기 전에 표변해 버렸다. 오히려「모스크바」3상회담의 결정에 감사한다는「메시지」까지 보내는 형편이었다. 신탁안이 소련의 제안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안 것이다. 심지어는 민주주의 민족전선 주최로 3상회담지지 대회를 열고 전국적인 지지 시위에 들어갔다. 또 하나의 외세를 앞두고 민족상잔이 벌어진 것이다. 이 무렵 김구 주석은 자주 이 박사를 찾아와 숙의했다.
「하지」는 「아널드」로 하여금 『1개월 안에 임정을 세워 신탁을 끝낼 수 있다』는 등 여유를 보였다. 이 박사를 도외시한다는 것은 곧 미국 안의 압력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박사는 본래 어떤 위기에도 당황하지 않고 실망을 모르는 인물이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용기와 자신을 갖고 임하는 인물이었다.
1월 중순에 들어가자 미·소의 대표들이 서울에서 공동위원회를 갖는다고 성명하였다. 본격적으로 3상 결정의 진행에 들어가는 것이다. 임정이나 한민당에서는 거의 속수무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김구 주석도 대세 앞에서 어찌할 바가 없었다. 반탁 투쟁만으로는 아무런 실효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전국의 눈이 이 박사만을 보고 있는 듯 했다.
미소 공동 성명과 때를 같이하여 이 박사는 김구 주석에게 최고정무위원회를 구성 발표하도록 했다, 가공적인 형식에 불과한 이 정무위가 결정적인 정치의 계기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미·소에 대하여 『너희는 너희대로 해봐라.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나라를 우리대로 하겠다』는 하나의 실력 과시였다.
이 엄포는 즉각 효력을 나타냈다. 아무리 실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우리 국민은 우리의 정부(정무위)만을 지지하고 따르겠다는 태도에는 그도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돼서 구성 발족된 것이 민주의원이다. 정부 형성을 위한 준비 기구가 비로소 우리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계속> 【윤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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