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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3) 제26화 경무대 사계 여록 내가 아는 이박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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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본격적 국내활동>
이 박사의 조선「호텔」 생활은 3, 4주간이었다. 그동안 그와 나는 자주 「하지」나 「아널드」 등의 미군정 당국자와 만나 정국에 관해 의논했다. 이 박사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극진했다. 이 박사도 그들을 위한 「파티」를 자주 베풀었다.
이 박사는 그들에게 유능한 한국인을 많이 소개해주고 군정과 친근히 지내기를 희망했다. 한민당 간부들의 군정접근도 쉽게 이루어졌다.
이 박사를 찾아오는 방문객은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매일 3, 4백 명이 몰려오고 못 만나고 돌아가는 수도 적지 않았다.
먼 지방에서 오는 동포가 많았다. 이런 사람들은 얼굴만이라도 보고 가겠다고 졸랐지만 면회주선은 정말 진땀나는 일이었다.
장덕수씨는 이런 이 박사의 형편을 이해해 돈암장을 주선해 주었다. 돈암장으로 옮긴 것은 이 박사의 국내활동을 본격적으로 자유스럽게 하기 위해서였다. 오랜 나그네 같은 생활에서 그는 모국의 냄새가 풍기는 생활이 소원이었다. 특히 우리 고유의 음식 맛을 봤으면 하는 것은 일상의 푸념이었다.
호박이나 미나리 파로 부친 전은 아무리 많이 놓아도 모두 들었다. 돈암장에 옮기면서 나는 그의 생활과 활동을 규모 있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월 5, 6만원의 생활비는 한국민주당에서 내기로 김성수 송진우씨 등과 약속되었다. 때로 필요한 큰돈은 그때마다 내가 구해서 댔다. 비서도 국문·한문 영문 등등으로 10여 명을 각계에서 선정했다.
정인보씨 등 가까운 친구들이 인선을 해주었다. 윤석오·황규면 변영태 유자후씨 등이 초기부터 나와 같이 애를 써 주었다. 안 살림은 나의 아내 이은혜가 전적으로 맡았다. 이미 미주시대부터 그의 생활습관을 잘 알고 있었고, 그도 3·1운동에 숙명대표로 활약한 터여서 노애국자를 숭배했다. 그러나 20여명이 되는 식구와 하루에도 수백 명씩 몰려드는 손님을 치르기 위해서는 안 살림을 위한 지배인 같은 관리자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선택된 사람이 곧 이기붕이었다. 그를 들인 것은 바로 나였다. 그와 나는 「뉴요크」시절부터의 지기였다. 그는 성품이 차분하고 조용하며 과묵한데다 고분고분했다. 그는 명문의 가계였으나 그의 조부가 이조 말의 정치관계로 불행하게 폐가되었다.
그의 조부와 그의 비참한 죽음을 생각하면 운명이란 걸 느끼게 된다. 그는 「뉴요크」에 있을 때도 고생을 많이 했다. 그는 어진 어머니의 정성으로 보성중학을 나왔었다. 귀국한 후에도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때로 그는 나를 찾아와 그의 처지를 의논하곤 했다. 나는 돈암장에 옮기면서 그를 부를 일이 마음으로 기뻤다. 후일 그가 한참 왕성할 때 아들 이강석이를 이박사의 양자로 하겠다고 내게 양해를 구해왔다. 이 박사와 나의 사적관계를 아는 터여서 의논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양자문제에 대해선 분명히 반대했지만 그는 내 반대를 묵살했다.
돈암장에 옮긴 뒤로 국내의 정치정세는 더욱 복잡해져갔다. 초기 그토록 가까웠던 군정과의 관계에도 명암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박사와 「하지」와의 사이는 임정에 대한 태도에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하지」는 장개석 주석과는 달리 상해의 임시정부를 좋아하지 않았었다. 이 박사의 태도는 시종일관이어서 임정이 한국의 법통이며 체계라는 걸 고집했다. 그의 정신의 기반은 어디까지나 기미 3·1정신이었다. 그러나 미국사람들이 우리의 정신적 기반을 이해할 리 없다. 「하지」는 그들이 수집한 임정에 관한 조사를 제시하고, 박사께서도 결국 임정에 대해 실망하게될 것이라고 충고까지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일반이 모르는 잠재적인 이유도 숨어있다고 안다. 「하지」의 정치고문으로 있던 「랜던」은 일제 때에 서울에 와있던 영사였다. 그는 친일적인 인사이면서 여운형이나 박헌영 등과 가까웠다. 공산당이나 인민당에서는 임정이 법통정부란 데에 크게 반발했었다. 중국공산당의 모택동이나 주덕 등은 김구 주석 일행의 임정을 정식으로 한국정부로 인정했으나 여운형 등은 임정을 망명객의 부패집단이라고 하여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왔었다. 나는 이 박사의 곁에서 그런 「랜던」의 일거일동을 주시했었다. 또 한사람 「하지」의 연락관으로 「버치」가 있었는데 그도 고문역할을 하였다. 「버치」는 나와 「프린스턴」의 동창으로 서로 초대하며 자라를 같이하였다.
그러나 「버치」도 「랜던」과 같이 임정보다는 좌익계에 관심이 쏠려있는 듯했다.
한국민주당에서는 송진우를 필두로 이 박사와 보조를 같이했다. 좌익계 외에는 전체가 임정지지로 단결된 셈이다. 「하지」는 그러나 임정을 한국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종당엔 임정의 환국을 승인하면서도 입국의 형식만은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하지 않고 개인자격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했다. 이 문제로 하여 이 박사와 「하지」와의 사이는 근본적으로 금이 갔다. 그들은 미국의 정책을 내세웠고 법이론으로 나왔었다. 임정에 관한 이 박사와 「하지」와의 싸움은 근 한 달을 두고 벌어졌다. 결국 이 박사는 임정이 들어온 다음에 거족적으로 체통을 내세워 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좌익계를 제외한 정당단체와 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계속> [제자 윤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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