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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태어난 아기의 시선으로 서울을 표현하고 싶었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서울 청담동 거리에 선 아르두앵. “사진가가 원하는 게 뭔지 안다”면서 모델처럼 셔터를 누를 때마다 다양한 자세를 취했다.

낯선 곳으로 떠날 때 가장 먼저 찾는 게 여행 책자다. 명소·맛집·교통편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가이드북으로 우선 예습을 해야 불안감이 조금은 사그라진다. 발 닿기 전부터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리는 데도 그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이 남자, 일부러 아무것도 알려 하지 않고 서울을 찾았다. 더구나 서울의 안내 책자에 실릴 사진을 찍으라는 미션을 안고서다. 이 ‘묻지마 촬영’을 감행한 이는 프랑스 사진작가 티에르 아르두앵(52). 그가 찍은 사진들은 11월 28일 발간된 루이뷔통 시티가이드북 서울 편에 실렸다.

루이뷔통은 1998년부터 파리·뉴욕·런던·도쿄 등 세계 각국 대표 도시를 소개해 왔는데, 올해는 서울과 베이징판을 제작했다. 그리고 올해 서울판부터 일러스트를 사진으로 대체했다. 여느 가이드북처럼 글에 소개된 곳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서울에 관한 하나의 이미지를 담는 작업이었다. 그는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아무 선입견 없이 현장에서 부닥치고 직접 느낀 서울을 카메라에 담았다. “막 태어난 아기의 시선으로 가장 순수하게 서울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 이방인에 비친 서울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26일 출간기념회에 맞춰 다시 서울을 찾은 그를 만났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서울

3 서울 인사동 한옥 식당에서 만난 할아버지. 배경과 피사체가 만드는 빛의 대조가 두드러진다. 4 가이드북 맨 앞에 실린 세종대왕상 사진. 그는 “왕의 손짓이 마치 외국인에게 어서 오라는 환대 같았다”며 “한글을 모르는 외국인에게 글자 자체가 이국적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말했다. 5 서울시청 앞 건널목의 시민들 모습. 6 한국 전통 의상의 이미지를 한복원단과 사진 속에서 찾아냈다.

예술가의 포스가 느껴지리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평범한 관광객처럼 보였다. 아담한 체구에 편안한 면바지와 가죽점퍼, 뭣보다 전문 사진가의 것이라기엔 날렵해 보이기까지 한 카메라 가방이 그랬다.

그는 올 2월 초 서울에서 1주일간 머물렀다. 혼자였다. 낮이 짧은 겨울에 빛을 활용해 사진을 찍으려니 부지런히 다녀야 했다. 이태원은 금요일 저녁, 강남역은 주말, 시장은 새벽, 이런 식으로 장소마다 가장 활동적인 시간을 정했다. 배낭여행 하듯 하루 12시간씩 걸으며 서울 거리를 찍었다. 3000여 컷 중 책에는 15컷만 실렸다. 그는 서울이란 도시의 이미지를 말해 달라자 “참~컸다”며 웃었다.

“첫인상이라면 건축적인 면에서 도시가 주는 대조였어요.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건물 사이사이로 작은 골목에선 옛날 집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이 보였어요. 아, 또 하나 있어요. 서울엔 어딜 가나 스크린이 있더라고요. 지하철역, 버스정류장, 건물 옥상까지 뭔가를 봐야 하는 도시 같았어요.”

그의 말마따나 사진마다 모던한 것과 전통이 공존한다. 서울시청 앞에서 찍은 사진도 그렇다. “처음 봤을 때 그저 현대적 건물이 오래된 건물의 앞을 파도 같이 덮고 있는 게 흥미로웠죠. 나중에 앞 건물은 일제시대 지어진 것, 뒤 건물은 최근에 완공됐다는 얘기를 듣고 한국의 근현대가 연결된 사진이라고 여겨졌어요.”

하지만 미리 정하고 찍은 사진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자유로운 산책자처럼 거리를 거닐다 마음이 동하면 셔터를 눌렀다. 한순간이지만 다양한 이야기가 숨어 있는 장면을 포착하려 했다. 책자를 들추던 그가 시선을 멈췄다. 한옥집 마당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당시 묵었던 인사동의 어느 호텔에서 안국역으로 가는 길이었단다. 이른 아침이라 작은 골목길 안에 한옥 식당들이 문이 닫혀 있었는데 그곳만 열려 있어 빠끔히 안을 들여다봤다. 그런데 안에 있던 할아버지가 들어오라 손짓을 하더니 차까지 대접해 줘 크게 감동했다. “할아버지를 찍고 싶었는데 거절하시더라고요. 하지만 완벽한 빛이 내려오면서 한옥 지붕과 그의 얼굴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그냥 포기할 수 없었죠.” 마침 할아버지가 잠깐 뜰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이 딱 셔터 두 방을 날렸다.

그 사진, 몰래 촬영을 할 만큼 특별해 보이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내 설명이 이어졌다. “봐요, 할아버지 뒤로 신발이 여러 켤레 있잖아요. 외국인 눈에는 궁금할 장면이죠. 노인의 집에 저 많은 구두가 있는 이유가 뭘까라는.”

강한 흑백의 대조 … 서울 낯설게 보기
사진들은 한눈에 봐도 특이하다. 일단 모두 흑백 사진이다. 게다가 여행책자란 말이 무색하게 덕수궁이나 63빌딩, 한강 같은 명소가 없다. 청담동이나 명동 쇼핑거리 대신 동대문 시장에 쌓인 한복 원단을, 그럴듯한 한정식집 대신 냉면·만두집 창문을 보여준다. 광화문 고층 건물도 정작 포커스는 그 앞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에 맞춰져 있다. 어쩐지 서울사람에게 낯선 서울. 이유를 물었다.

“흑백 사진은 루이뷔통에서 요구한 사항이었어요. 어찌 됐든 흑백 사진의 장점이 분명히 있죠. 빛을 이용해 음영을 부각시키면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어요. 가령 어두운 시장 안에서는 음식에서 나오는 수증기가 극대화된 대조를 이루죠.” 그가 인터뷰 내내 빛을 강조한 이유였다.

명소를 배제한 것에는 의도가 다분했다. 관광객 대부분이 서울에 와서 유명한 곳을 둘러보고 사진을 찍지만 그는 그게 서울의 본질이 아니라 생각했단다. 오히려 덕수궁 돌담길에 비친 햇살이나 서울 골목골목에서 마주쳤던 사람들,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그리고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 더 기억에 남았다. “어쩌면 서울의 진짜 성격이 그게 아닌가 싶어요.”

“파리라면 비스트로의 사람들 찍겠다”
기실 루이뷔통과 인연을 맺은 것도 이런 남다른 시선 때문이었다. 1991년 그는 현대 사진의 금기를 없앤다는 취지로 창작집단 ‘탕당스 플루(Tendance Floue, ‘흐릿한 성향’이란 뜻)’를 공동 창립했다. 집단에는 현재 13명이 소속돼 각자의 사진을 재조합하는 등의 공동 작업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프랑스 대표 사진축제인 아를 포토 페스티벌(Arles photo festival)에 참가했는데 이곳을 찾았던 루이뷔통 측이 탕당스 플루의 작품을 눈여겨보고 이번 촬영을 맡겼다(아르두앵 외 회원들 역시 과거 시티가이드북이 나왔던 도시 14곳의 촬영을 했다). 각자 한 곳씩 맡게 되자 그는 서울을 1순위로 꼽았다. ‘아시아에서 안 가 본 곳’이란 이유였다.

어찌됐든 아티스트와 럭셔리 브랜드의 협업일 터인데 그는 그 ‘상업적 용도’에 개의치 않았다. 어디에 어떻게 노출되더라도 그저 대중에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주길 바란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게 작가의 역할 아닐까요. 이번엔 그게 서울이 된 것 뿐이죠.”

그럼 익숙한 파리를 찍는다면 어떤 사진이 나올까.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그는 너무 뻔해서, 너무 많은 대가들이 찍어 왔기에 가장 어려운 도시라며 뜸을 들였다. 그러고는 한참 뒤에야 답을 내놨다. “비스트로가 좋을 것 같아요. 그 곳에서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대화하면서 식사 하는 모습이 가장 파리답다고 해야 할까.”

가이드북이 나왔고 이방인과 서울의 인연은 거기까지인가 싶었는데 반전이 생겼다. 그는 인터뷰 1주일 전부터 이미 서울에 와 있었다며, 앞으로도 종종 서울에 오게 될 거라며 어깨를 살짝 들어 올렸다. 2016년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문화프로젝트에 ‘탕당스 플루’가 참여하게 된 것이다. 양국 아티스트들이 다양한 협업을 벌일 예정인데, 그 역시 한국의 그래픽 디자이너·언론인·소설가·예술가들을 계속 만날 준비를 하고있다. 2016년 봄 디지털 책자 발간과 전시도 기획 중이다. 앞으로 그에겐 서울 가이드북이 진짜 필요 없을지 모를 일이다.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루이뷔통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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