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영주군 압각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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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경북 영주군 순흥면 내죽 2리 98. 금성단엔 수령 1천3백년 (영주 향토지 기록)을 넘었다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하늘을 가리며 서 있다. 노목의 이름은 압각수-. 밑둥치 둘레 8m에 높이 30여m, 밑뿌리는 자그마치 사방 1백여평에 뻗쳐있다.
나이탓인지 원둥치 옆부분은 썩어서 속이 비었다. 그러나 이 거목은 1백여 가구내 죽리 주민들의 유일한 휴식처이기도 하다.
한 여름 정오쯤 해가 이 나무꼭대기에 얹혀도 나무 밑 주위는 햇별 한점 스며들지 않는 어둑한 그늘이 진다.
압각수는 이조 세종의 6째 아들 금성대군 (단종의 숙부) 의 단종 복위 운동과 관련, 파란 많은 전설을 지니고 있어 더욱 유명하다.
금성대군은 5백l6년 전인 1456년 (세조 3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순흥으로 쫓겨날 때 이 거목에서 불과 20m 떨어진 곳에 움막을 치고 나무를 벗삼으며 외롭게 살았다고 한다.
이듬해인 1457년 대군은 이곳에서 다시 단종 복위를 피하다가 순흥부사 이보흠의 밀고로 최후를 마쳤고 순흥부 (지금의 읍내리·내죽리)는 세조가 내려보낸 군졸들의 손에 의해 순식간에 쑥밭으로 변해버렸다.
순흥 안씨를 비롯, 지방에서 행세께나 하던 수많은 부민들이 이 사건에 관련, 목이 잘렸고 지금의 소수 서원 위쪽 개울에서 10여리를 흘러내린 피가 내죽리에서 멎었다고 한다.
그래서 내죽리를 일명 「피끝」 마을이라고도 한다.
촌로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압각수는 금성대군이 세조에 의해 한많은 세상을 떠난 그해부터 내리 2백년 동안 죽은 듯이 시들시들 한 것을 이곳에 금성단을 만들고 대군의 신위를 모시자 그 이듬해부터 새순이 하나 둘씩 돋아나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곳 유림들은 그 이후부터 이 거목을 보살펴 오다가 10여년 전부터 근처에 논·밭 5마지기를 일군 배학수 노인 (67)에게 주고 관리를 맡겼다.
그러나 예산 부족으로 나무 주위에 떼를 입히는 것이 고작으로 보호의 손길은 거의 미치지 못하고 있다. 잎은 해충에 뜯기고 마을 개구장이들은 나무가지에 올라가 설익은 열매를 사정없이 따 내리고 있다.
몰지각한 일부 주민들은 해숫병에 좋다고 껍질과 가지를 마구 잘라 내고있다.
게다가 뿌리는 인근 논밭에까지 뻗쳐 농사일로 상하는 일이 자주 있다고 한다.
배 노인은 아침 저녁으로 나무 주위를 돌며 보살피지만 혼자 힘으로는 개구장이들의 짓궂은 장난을 막을 수가 없다고 안타까와했다.
6·25동란 때엔 이 거목도 남다른 수난을 겪었다. 인민군들이 텅빈 원둥치 속에다 불을 질러 일부가 타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온갖 고난을 참고 이겨낸 이 거목은 지금도 「피끝」 마을을 말없이 굽어보며 웅장하게 버티고 선채 뿌리에서 돋아난 또 한 그루의 나무가 이미 수령 5백년이 넘는 거목으로 자라났다. 이 거목을 국가에서 보호수로 지정해 주길 바란다는 배 노인은 우선 주위에 방책 시설만이라도 해줄 것을 아쉬워했다.

<영주=이기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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