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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삼천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나는 시방 천수를 다한 선풍기 소리를 들으며 흰모래를 뒤엎고 밀려 닥치는 남해의 파도소리랑 고향 생각을 해본다. 인생을 알기 전에 이 고장 산하를 내 것처럼 누볐었으나 그때는 아름다움을 아직 알리 없는 나이였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마 내 뼈를 묻을 곳이라 생각해서부터 인지 그지없이 아름답게만 보이니 어쩌랴. 고행 끝에 얻은 어느 화인의 진리처럼 「아름다움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 했듯이 나도 이젠 화업 30여년에 철들어 고경의 아름다움을 늦게나마 아나보다.
흔히들 고향자랑엔 산과 들이 따르기 마련이나 내 고향만은 에누리없이 산자수명한 고장이다. 서북쪽에 유연히 솟은 망운연봉은 우리를 길러온 어머니의 젖가슴 마냥 아름답다. 젖가슴 같은 이 연봉은 항상 수줍은 듯 흰 구름을 안고 천년의 신비를 지녔다. 삼복더위를 피하여 물놀이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 달랑달랑 오동골 폭포 터로 오르내렸고 고무신짝을 벗어들고 가재를, 그리고 송사리 떼를 따라 한없이 쏘다녔던 곳.
망운연봉 밑에 다소곳이 엎드린 안두봉은 백년의 노송을 안고 백경를 품었으니 한 폭의 그림이다. 동쪽 강진해의 해풍을 막고 남북으로 가로놓인 봉강산은 내가 즐겨 그린 그림의 소재다. 남문 밖 양지쪽엔 아령 같은 남산이 더욱 추억을 일깨운다. 이 산은 내 발자국으로 다듬어진 산이기에 말이다.
그밖에 호암 계명 용문 금산 등 선현들의 명명에 얽힌 옛 이야기는 이루 다 기억할 수 없다.
그 중에서도 금산은 명산중의 명산이다. 전설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비단으로 싸고싶도록 아름다운 산이다. 영남에서 일컬어 소금강이라니 말이다. 유명한 기도암이 있고 산정에서의 현해탄 일출광경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장관이다.
동백꽃 정열 밑에 섬 처녀들의 낭만이 싹트고 밭 두렁 논두렁에 치자꽃향기가 농도를 더할 무렵이면 이 섬에도 어김없이 여름이 온다. 느티나무 밑 송덕비 뒤편에서 촌노들의 장군멍군소리에 여름은 한 걸음 다가서고 오동골 비탈길에 아낙네의 물놀이 행렬이 장사진을 이루면 여름은 기승을 떤다. 갯마을 처녀들이 다목적 조개잡비를 나선다. 임도 보고 조개도 잡고 멱도 감고 말이다.
열기를 내뿜는 흔들 머리 선풍기 소리를 들으며 마음은 고향바닷가를 거닌다. 기승들이 모이는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한번 가면 못 잊을 곳이다. 금산은 북풍을 막고 외연히 수려하고 청계가 흘러 바다로 스며들고 송림이 도열하여 마을을 지키는 곳. 담수와 송음과 백사가 아름다운 대조를 이루는 숨은 명승 해수욕장이다.
선남선녀들이 마음놓고 여름을 즐길 수 있는 곳이라 뭇 사연이 엉겨 멍든 듯 현해탄의 푸른 파도도 여기선 옥로되어 밀려오고 금산청풍이 내리 불어 상주는 신선의 놀이터이려니 생각하며 향수에 몸부림치는 마음의 파도를 달래면서 남창 하에 놓여진 금산산 난초의 청초를 바라본다. <글·그림 이준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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