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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담임 선생님께서 길에서 사회인이 된 제자들을 만나면 남학생들은 감격한 목소리로 『선생님, 저, 아무개입니다』하고 손을 덥석 잡으며 『무슨 학교 몇 회 졸업생입니다. 반갑습니다. 지금도 교편을 잡으십니까? 선생님, 제가 약주 사겠읍니다. 지금 저는 이런 생활을 합니다.』
이렇게 탁 터놓고 기뻐하며 때로는 어려운 일을 상담하러도 오고 종종 찾아주는데 여학생들은 못 본 척 하고 달아나고 편지를 하나, 전화를 한번 주나 여학생은 가르쳐도 보람이 없단 말야. 물론 저희들대로의 이유가 있겠지만 사회적 지위에 오른 여류명사나 알만한 사람들도 다 그렇단 말야 하시며 퍽 섭섭해 하셨다.
나는 그때 『난 그렇지 않다. 우리 반 우리학년 여학생들은 절대로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겠다』하고 무언의 약속을 하였었다.
2, 3년 전부터 끊었지만 중·고등학교에 가서도 가끔 편지도 하고 뵙기도 하였었다. 그리고 지금 집에 있으면서도 뵙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물론 한번도 찾아 뵙진 못했지만 그 이유로는 참으로 구구한 변명이 많다.
그런데 오늘 나는 바로 그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나를 보지 못했다. 난 골목으로 마구 도망을 쳤다. 선생님은 그 당시와 꼭 같이 조금도 늙지 않으셨다.
골목 안에 피한 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내 자신이 어찌나 초라한지 정말 환한 햇빛이 부끄러웠다. 『바보! 지금 이대로면 어떻단 말이냐. 앞으로 훌륭하게 되면 될 것 아냐.』 마음이 무겁고 떨렸다.
조금 있다 나오니 선생님은 저만치 걸어가고 계셨다. 나는 몇 번이고 달려가 선생님을 부르고 싶다.
초등학교 때처럼 허리를 굽혀 꾸벅 절을 하고 싶었다. 『선생님』하고 부르고픈 그 말은 차마 나오지 않고 입안에서만 맴을 돌았다. 『선생님, 못난 제자를 용서하십시오….』 <최명숙 (경남 마산시 완월동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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