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학회 장사, 저널 장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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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정재승
KAIST 교수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국제학회에서 초청강연을 하는 건 지적으로 흥분되는 경험이지만, 늘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지난해, 중국에서 열리는 한 신경과학 관련 학회에 초청을 받아 학술발표를 하러 갔다가 당혹스러웠던 적이 있다. 서너 해 전에 시작된 이 학술대회는 유난히 비싼 등록비를 받고 있었는데, 초청강연자에게는 할인을 해주었지만 신생 학회치고는 여전히 무리한 금액이었다.

 막상 학회에 가보니, 큰 음식점의 룸들에서 각 세션이 벌어지고 있었고 분야별 세션 참가들이 2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홈페이지에는 컨벤션 센터에서 열릴 것처럼 떠벌렸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학회 주최도 그 실체가 모호했는데, 권위 있는 학술기관이 아니라 짐작으론 중국의 한 여행사인 것 같았다. 그들이 제공하는 투어 프로그램도 값은 엄청나게 비쌌지만 실상은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한발 양보해 그저 ‘여행 상품’이라고 쳐도, 그들이 받은 가격만큼 고급은 아니었다.

 그 학회에서 우리 분야의 좋은 참가자들도 만났고 배운 것도 있으니 영 엉망인 경험은 아니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이제는 여행사들이 학술대회로 장사를 하는구나!’ 하는 탄성이 한숨처럼 나왔다. 대규모 학술대회는 한 도시에 수만 명의 참가자들이 며칠간 머무니, 상업적인 요소가 없을 순 없다. 그런데 그때 경험에서 더 불쾌한 인상을 받은 건 아마도 주객이 전도된 느낌 때문이리라. 요즘 이런 학회 초청강연 요청을 매달 서너 번씩 받는데 그 후론 답장을 못하고 있다.

 게다가 요즘 과학자들은 낯선 저널로부터 논문을 투고해 달라는 e메일도 하루에 열 통 가까이 받는다. ‘오픈 액세스 저널(Open Access Journal)’이 등장하면서 이런 경향이 더 심각해졌다.

 1990년대 중반 ‘과학지식을 누구나 공유할 수 있도록 하자’는 멋진 취지의 운동이 시작되면서 오픈 액세스 저널이 탄생됐다. 시민으로부터 받은 세금으로 연구해 얻은 과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국민들이 다시 돈을 내야 읽을 수 있는 건 부적절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그래서 ‘논문 저자들이 꽤 큰 금액의 논문 게재료를 내고, 대신 독자들은 무료로 저널을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이 바로 오픈 액세스 저널의 취지다.

 미국국립보건원 원장을 지낸 노벨상 수상자 헤럴드 바머스 등 일군의 과학자들이 앞으로 상업화된 저널에는 자신의 논문을 제출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동참을 호소하는 편지를 돌리자, 수만 명의 과학자들이 지지 의사를 밝혔고, 덕분에 오픈 액세스 저널은 지난 10년간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저널 형식이 됐다. 미국에서 결성된 비영리 과학자 단체인 ‘과학 공공도서관(PLoS)’이나 스위스 과학자들이 만든 프론티어스(Frontiers)는 신뢰할 만한 오픈 액세스 저널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과학자들은 이렇게 근사하게 탄생된 오픈 액세스 저널의 부작용을 날마다 e메일로 경험하고 있다. 과학자들에게 논문 투고를 요청해 논문 게재료를 챙기려는 오픈 액세스 저널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지게 된 것이다. 2011년 통계에 따르면, 오픈 액세스 저널이 6000종 넘게 발간됐다고 하니, 지금은 족히 1만 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저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논문 투고 요청 e메일을 학계에 뿌리고 있는 것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과학의 상업화를 반대하는 운동 때문에,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논문 장사를 하는 본격 상업 저널들이 생겨난 셈이다.

 최근 한 연구자는 엉터리 논문을 수백 개의 오픈 액세스 저널들에 제출해 그중 상당수가 게재 승인된 사실을 폭로하면서, 오픈 액세스 저널의 신뢰도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기존의 저널들도 논문 심사 과정에 허술한 부분이 없진 않겠지만, 오픈 액세스 저널의 부작용이 계속 터져 나오고 있는 건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학자들이 최신 연구 성과를 공유하고 통찰력 있는 질의응답을 나누는 학술대회는 학자들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다. 나 또한 매번 학회에서 학문적 열정을 충전받으니까. 또 연구비에서 게재료를 지급하고 시민들은 누구나 무료로 논문을 읽을 수 있도록 한 오픈 액세스 저널의 취지는 학계의 좋은 전통으로 자리 잡을 거라 믿는다.

 가슴 아픈 건 저널 장사꾼, 학회 장사꾼들이 논문 한 편, 이력서 한 줄에 들어갈 학술발표 하나에 목매고 있는 과학자들의 현실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논문 압박에 시달리는 학자들이 그들에겐 얼마나 탐나는 먹잇감으로 보일까.

 이름 모를 저널로부터 온 논문투고 e메일을 지우다가 갑자기 서글퍼졌다. 논문과 학회를 향해 위험한 질주를 멈출 수 없는 불나방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져서.

정재승 KAIST 교수·바이오 및 뇌공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