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sia 포커스] “50개 민족 학생들, 차별·갈등 없이 함께 공부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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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소재 ‘한인 학교’에서 한국 춤을 추는 러시아 여학생들. 다양한 문화를 접하게 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사진 1086학교]

넬리 니콜라예브나 엄(73)은 올해로 교직 생활을 시작한 지 55년째다. 1958년 ‘모스크바 1225 유치원’에서 교사를 시작한 그는 러시아 유일의 한민족학교인 1086학교 설립자이자 교장이며, 러시아 명예 교사이자 교육학 박사다. 해외 한국어 발전 공로로 국민훈장도 받았다. 넬리 엄을 만나봤다.

넬리 엄 교장에게도 그 학교 학생들처럼 한국어가 모국어는 아니다. 엄은 ‘철의 장막’이 무너지고 한국ㆍ러시아 외교관계가 수립된 뒤 한국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모스크바에서는 89년부터 민족 공동체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한국어 교육 문제가 급부상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엄 교장은 “우리는 한국인의 외모에다 한국 음식을 먹고 있는데, 모국어와 전통 같은 것을 정작 알지 못했다. 이게 러시아 한인 한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쉰 살이 다 된 나이에 모국어를 배우기로 결심했다”고 말한다.

그 뒤엔 ‘나도 이 나이에 배웠는데 남들이라고 왜 못 배우겠는가’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모스크바 남부에 한민족학교(1086학교·일명 고려인 학교)가 설립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거기서 러시아 한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선조의 전통과 한국 지리를 알려주며 자신들이 도대체 누구인지, 다시 말해 ‘러시아 한인들’이 누구인지를 가르친다.

학생과 함께한 엄 넬리 교장(오른쪽).

-한국 학교를 설립해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했나.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아이들이 함께 모여 공부하고, 한국 문화를 접할 수 있는 한민족학교를 설립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80년대 후반, 내가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할 때였다. 90년부터 모스크바로 한국인이 자유롭게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동포들이 사는 모습을 궁금해 했지만 우리는 한국어를 몰랐기 때문에 통역 없이는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나는 91년 모스크바시 교육국장, 중앙연방관구대표와 함께 처음 서울을 방문해 한국의 교육 정책을 알게 됐다. 그 뒤 한국 학교를 세우자고 제안했다. 90년대 초반 러시아 경제가 어려웠지만 모스크바시 교육국은 이 제안을 지지했고, 시 정부는 재정 지원을 해 줬다. 그렇게 92년 9월 1일 개교를 했다. 900명이 입학했는데 그중 고려인은 150명밖에 되지 않았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과 관계를 갖고 있나.

“처음부터 한국 교육 시스템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모스크바시 교육국과 서울시 교육청이 협력 협정을 체결한 이후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특히 1학년부터 11학년까지 전 학년을 위한 한국어 교과서를 집필할 땐 한국 교사들의 경험이 필요했다. 매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는 한국어진흥재단과 공동으로 양국 교사진이 양국의 교육 시스템과 교육 기관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도록 연수 프로그램을 주최한다. 우리 학교는 양정학원과 협력해 매년 두세 차례 양정학원을 비롯한 여러 학교 교사진이 우리 학교에서 연수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국어 교육 외에 다른 학교와의 차이는.

“우리 학교에서는 한국어, 한국문화뿐 아니라 러시아와 기타 문화를 배우려는 모든 학생이 공부한다. 다른 민족의 풍습과 전통, 다양한 문화를 다 배운다. 모든 민족은 웃어른 공경, 약자 보호,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같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우리 학교에는 50개 민족의 학생들이 공부한다는 것도 다른 요소다. 이렇게 다양한 민족의 학생들이 공부하지만 민족 간 갈등은 전혀 없다. 그래서 모스크바의 학부모들은 먼 거리에서도 아이들을 입학시킨다. 우리 학교에는 학생이 어떤 민족이든지 차별 없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러시아 한인 자녀들이 다른 민족 학생들보다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쉽게 이해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어떤 민족이든지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어떤 아이들은 매우 노력하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있다. 누군가는 어학 능력이 뛰어나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한국인 출신이라 해서 다른 학생들보다 한국어와 문화를 더 쉽게 배운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5대5 정도다.”

-최근 러시아 교육도 끊임없이 개혁하고 있다. 한국과의 차이는.

“ 러시아의 교육 시스템은 한국 교육 시스템과 크게 다르다. 러시아 교육 수준은 한국보다 높다. 예를 들면 러시아에서는 영재 교육을 학교 선생님들이 담당하는데, 한국에서는 특별 교육 기관이 담당한다. 그뿐 아니라 교장의 권한도 한국보다 러시아가 더 높다. 물론 교장의 책임은 어느 곳 할 것 없이 크긴 하다. 앞으로도 러시아의 초·중·고등학교가 한국 학교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좋은 부분은 앞으로도 서로 도입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학교에서 오래 전부터 해온 현장학습(박물관 수업)이 모스크바 학교에서도 진행될 것이다. 얼마 전 열린 제 1차 모스크바 교수법 세미나인 ‘모스크바 수업’에서 이런 결정이 내려졌다.”

-한인 학교 졸업생들의 진로는.

“다양하다. 많은 학생이 모스크바의 유수 대학을 졸업해 하고 싶은 분야에서 활동한다. 한국어 관련 직업에 종사하는 학생들도 있다. 러시아의 대학이나 한국에서 한국어를 계속 배우기도 하고 상하이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도 있다.”

엘레나 김 기자

본 기사는 [러시스카야 가제타(Rossyskaya Gazeta), 러시아]가 제작·발간합니다. 중앙일보는 배포만 담당합니다. 따라서 이 기사의 내용에 대한 모든 책임은 [러시스카야 가제타]에 있습니다. 또한 Russia포커스 웹사이트(http://russiafocus.co.kr)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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