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509)<제자 윤석오>|<제26화>내가 아는 이 박사 경무대 4계 여록(136)|곽상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이 박사와 야당>(11)
이 박사 행정부의 통치는 갈수록 강경 수단을 강화했다. 부산정치 파동서 등장한 소위 민의나 애국을 앞세운「테러」풍조에 행정부도 물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부산정치 파동 때의 의원집단 연행, 2·4보안법 파동 때의 경위 권 발동, 7·29의원「데모」에 대한 경찰의 난폭한 실력저지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서도 유 석에 대한「테러」사건은 가장 졸렬한 문제의 처리방식이 아니었던가 한다.
사건은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시비에서 발단됐다. 휴전협정이 타결되기 직전인 53년 6월18일 이 박사는 한국헌병을 동원해 반공포로를 모두 석방했다. 이 사건은 휴전을 추진하던 미국 등 우방엔 심각한 충격을 주어 국제여론이 악화됐다. 그러나 휴전을 반대하던 국민의 눈엔 과단성 있는 영단으로 평가돼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유 석은「유엔」군과의 상의 없이 단행된 포로의 일방적 석방은 대「유엔」관계를 비롯해서 한국의 외교적 입장을 곤란하게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 석의 이런 성명이 보도되자 이른바 반공애국단체에서 사대주의자니 매국노니 하는 비난이 쏟아졌다.
유 석은 이런 비난에 대해 내가 내무장관이던 때 남한출신 의용군 포로석방을「유엔」군에 적극적으로 교섭해 실현시킨 일도 있지 않느냐』면서『석방자체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 방법』이라고 해명했다. 시비가 분분해지자 6월24일 유 석은 서울로 올라가 김우평씨 집에 숙소를 정하고 경무대에 면담을 신청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12시쯤 김씨 집에 괴한 여러 명이 습격해 들어와 잠자리에 든 유 석의 머리를 쇠망치로 때려 중상을 입히고 달아났다. 바로 이날 다른 한 무리의「테러」단은 성북동 유 석 자택을 습격해서 집을 파괴했다.
다음날 치료중의 유 석을 헌병이 연행해 가 서대문에 있던 육군형무소에 수감했다. 뒤에 들은 얘기지만 외부와 차단된 채 진행된 심문에선 엉뚱하게도 유 석·죽 산이 합작해서 대통령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도 내놓더라는 것이었다.
어떻든 유 석이 연행된 뒤 누구도 그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주변사람들이 나서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러던 중 어떤 국방위원이 우연히 육군형무소를 들러보다 유 석을 발견해 주변사람들에게 소재가 알러졌고 그때부터 외부의 구명활동이 시작됐다.
그래서인지 수감 27일째 되던 날 육군형무소로 진헌식 내무부장관·법무장관, 그리고 원용덕 헌병사령관 세 사람이 찾아왔다. 이들은 유 석을 소장 실로 불러내더니『이 대통령은 두 번이나 조 박사의 석방을 명령했으나 우리들이 합의를 보는데 시일이 걸려 늦게 되었습니다. 미안합니다』면서 불기소로 석방키로 했음을 통고해 주더라는 얘기였다.
세인이 널리 알고있는 이른바 김성주 사건도 바로 반공포로석방과 관련해서 헌병사령부가 저질렀던 사건이다.
이 사건의 경우 이 박사의 처사가 여론을 등졌다면 혹시 여론을 선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억압을 할 수도 있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라지 만 여론의 지지도 받고 있었으면서 이런 억압수단을 쓴 것이 이박사의 뜻과는 관계없이 무모한 과잉충성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이 박사 통치하에서 일어난 슬픈 역사였다. 어떻든 이박사의 주변에선 이런 유의 과잉충성이 자꾸 늘어가고 시정은 세도정치로 변해갔다. 경무대 비서,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특무부대장 김창룡, 내무장관 최인규 등은 이박사 치하의 세도가들이었다.
우리들 야당지도자들은 이박사의 독선에 기가 막힐 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박사는 내가 아니고는 어려운 일을 맡아 극복해 갈 사람은 없다고 보는 게 큰 탈이야.』유 석이 자꾸 하는 얘기였지만 이 박사의 태도는 바로 이런 한마디로 비판해야 했다. 그래도 우리 야당은 이 박사에 대해 혹독한 비판은 하지 않았다. 우리가 사석에서라도 주고받던 이 박사에 대한 가혹한 말이라야『그 양반이 노망한 모양이야』라는 정도였다.
정부와 집권당의 이런 억압통치와 이에 대항하는 야당간의 대립과 층돌로 정국은 언제나 불안한 긴장상태가 지연됐다.
중요한 정치문제로 대립이 생겨 벽에 부딪칠 때마다 야당이나 의회지도자들은 경무대로 이 박사를 찾아가 근원적으로 문제를 풀어보려 했지만 경무대엔 두꺼운 장막이 가리워 져 있었다.
이 박사가 야당사람을 만나기를 원치 않았던 것인지 그 주변에서 가로막은 것인지를 확실히 알지는 못했다.
말기의 일이지만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에서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유 석이 신병치료를 위해「월터리드」미 육군병원으로 떠나면서 경무대로 인사하러 들어갔다. 그랬더니 이 박사가 현관까지 나와 유 석의 손을 잡고 집무실로 안내하면서『정말오랜만이야, 왜 그리 오래 한번도 들르지 않았어』라고 하도 반갑게 맞아주어 어리둥절해지고 어쩌면 권좌에서도 고독한 노 박사 같아 가슴이 뭉클하더란 얘기를 들었다.
이 자리서 유 석이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사실을 얘기하고『제게「페어·플레이」를 하도록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했더니,『그런 델랑 마음쓰지 말고 건강한 몸으로 돌아 오라』고 진심으로 격려해주더라고 했다.
그런 얘기에서 보면 이 박사는 스스로 야당지도자의 면담을 기피한 것은 아닌 것 같았던 느낌도 든다.
(곽상훈씨의 글은 11회로 끝내고 다음은 국방장관을 지낸 손원일씨의 글을 싣습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