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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7)<제자 윤석오>|<제26화>내가 아는 이박사 경무대 사계 여록(134)|곽상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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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 박사와 야당>(9)
이 박사와 유 석의 결별은 거창 사건에서다. 거창 사건이란 공비토벌을 위해 거창군 신원면에 파견된 보병11사단 9연대 3대대 대대장 한동석 소령이 부역혐의가 있다고 해서 현지주민 수백 명을 직결처분한 사건이다. 유 석은 경남경찰국으로부터 현지주민의 직결처분을 비롯해서 토벌군의 횡포에 관한 보고를 받고 당시 총리이던 장 면 씨와 함께 임시관저로 찾아가 이 박사에게 이 사건을 보고했다. 그러자 신성모 국방장관은 따로 김철안 씨와 당시 여군소령이던 김현숙씨를 대동, 현지조사를 다녀온 뒤『그런 사실이 없다』는 정반대의 보고서를 이 박사에게 냈다.
이렇게되자 사건은 국무회의에 올려져 유 석의 제의로 내무-법 무 합동 조사반이 구성되게 됐다.
내무-법 무 합동조사반의 보고는 처음 경찰의 보고가 옳다는 것이었다. 유 석은 법 무와 함께 이 박사를 찾아가 합동조사반의 조사보고서를 제시했으나 이 박사는『당신 네 들은 신성모 국방장관이 물러가도록 바라고 있으나 그렇게는 되지 못할 것이다』라고 아주 불쾌한 얼굴을 하곤 안으로 들어가 버려 소상한 설명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사건을 두고 내각 안의 반목이 일어 그 처리가 지연되고 있는 사이 외지기자가 이 사건을 취재,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또 국회에까지 번져 국회조사단이 구성됐는데 이 조사단은 현지로 가다 공비를 가장한 국군의 총격으로 도중에서 되돌아오고 말았다. 정국은 거창 사건으로 아주 시끄러워진 것이다.
이럴 때의 어느 날 이 박사는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관계장관에게 사표를 제출하라고 단을 내렸다.
이 박사는『정부의 장관들은 서로 협력해서 일을 해야 잘 되는 법이오. 거창 사건으로 인해 내무·법 무·국방 세 장관들은 서로 협력을 하지 않은 까닭에 대한민국의 체면이 국제적으로 손상되었소』라면서『3부 장관은 이 책임을 지고 즉시 사임하시오』라고 선언했다.
그러자 유 석이 일어나『즉시 사표를 내겠습니다』면서『정부의 11부 국무위원들은 서로 협력하고 일을 잘하고 있습니다.
다만 신 국방장관만 협력하지 않는 실정입니다. 이번 거창 사건에 대해서도 엄연히 있는 사실을 없다고 복명서를 꾸며 대통령에게 보고해서 시간을 끌고 단호한 처리를 못했기 때문에 국가위신이 손상된 것입니다』라고 했다.
유 석은 이 말을 끝내고 국무회의를 뛰쳐나와 사임서 답지 않은 사임 서를 냈다.
이 사임 서를 옮겨보면『본직이 대통령의 명에 의해 사표를 제출하는바 각하를 보좌하던 국무위원의 1인으로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충언을 올리고 내무장관의 자리를 물러갑니다. 첫째 항공은 제도상으로 운영되어야 할 것이며 개인의 의욕으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둘째 정치는 죄인이니 양심적이고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십시오. 세 째 대한민국은 민주국가로 탄생했으며 반드시 민주국가로 성장 발전해야 합니다. 우리대한민국이 일보라도 민주주의로부터 후퇴할 때는 자유세계로부터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라는 것이었다.
이 박사는 고재봉 비서실장으로부터 유 석의 사표를 받고『이 사람이나를 설교하나』라고 못 마땅해 했다고 한다.
아무튼 유 석과 신성모가 오래 반목한 것을 아는 이 박사는 거창 사건을 유 석이 과장해서 신을 거세하는데 이용하려 한다고 봤고, 외신기자의 취재나 국회서 문제화된 것이 모두 유 석이 배후에서 한 노릇이라고 믿어 이 사건에 대해선 유 석을 아주 못 마땅해 했다는 것이 당시 이 박사 측근들의 얘기였다.
어떻든 이 박사에게 비친 신 국방은 가장 충성스럽고 성실하고 말 잘 듣는 사람이었고, 유 석은 고집 센 인물이었다고 나 할까.
내무를 물러난 유 석은 야당인 민국당의 사무총장으로 월간잡지『자유세계』의 발행인으로 이박사의 독재에 대항하는 민주투사가 되어갔다.
이 박사는 민국당이 의원내각제를 내세워 이 박사에 대항한 이래『민국당은 개헌세력으로 반정부세력』이라고 자주 말했고 2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민국당 후보를 국회에 보내지 말아달라는 지방유세까지 했었다.
그 무렵 이 박사는 민국당을 가리켜 농민의 희생을 발판으로 하고 지주와 자본계급을 옹호하는 특권정당이라는 비난을 여러 차례 담화형식으로 발표했었다.
민국당이 의회 안 야당계 무소속의원들과 합세해서 정부를 견제하고 장 면 총리를 다음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자 대통령의 직선제개헌을 추진하고 자기중심의 정당으로 자유당창당에 나섰다.
이 박사는 그 전까지만 해도 정당을 이조사색당쟁시절의 정파로 봐 대통령이 정당에 끼어 들어서는 안 된다는 태도였다.
그러던 이박사가 헌법을 직선제로 고치려고 나서면서 노동자와 농민 측 전국민을 기반으로 하고 국민을 대변하는 국민적 정당이 필요하다고 한 것이다.
이박사의 직선제개헌과 민국당 등의 내각책임제 개헌이 충돌하면서 우리헌정의 불행의 씨가 되는 최초의 불행한 정치 격돌 즉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난 것은 갈 알려진 얘기다.
정치에 폭력과 권력이 개입해드는 불행한 풍조가 생성되지 시작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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