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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6)제26화 경무대 사계 여록 내가 아는 이 박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주미대사를 맡아>(상)
51년 내가 하와이에서 치과의사 개업을 하고 있을 때 하루는 당시 하와이 총영사였던 김용식씨(현 외무장관)가 찾아와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귀국하라고 한다는 전갈을 했다.
나는 이때 환자들이 밀려 무척 바빴을 뿐 아니라 따로 벌여놓은 내 사업도 있고 해서 틈이 나면 고국에 가본다는 생각으로 『기회를 보아 가겠다』고만 말했었다.
그런데 며칠 후 김영사가 다시 찾아와 비행기표를 전해 주면서 『1, 2주 정도면 갔다올 수 있는거니 미루지 말고 되도록 빨리 귀국해달라』고 재촉해서 나는 할 수 없이 귀국했다.
이때는 전세가 다시 악화돼 이 박사는 부산에 피난 중이었는데 임시관저로 찾아가 뵈었더니 이 박사는 대뜸 『주미대사로 일좀해야겠어』라는 것이었다.
너무도 뜻밖의 말에 나는 처음에 퍽 당황했으나 곧 정중히 거절의 뜻을 표했다.
나는 이 박사에게 외교라는 것을 전혀 모를 뿐 아니라 개업한지 얼마 안된 병원이 이제 궤도에 올라서기 시작했는데 그만둔다는 것은 큰 모험이라고 설명하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음을 밝혔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이 박사는 『네가 네 후손에게 1백만금을 물려주겠느냐, 아니면 이 나라 3천만 민족을 먹여 살리겠느냐』면서 24시간의 여유를 줄테니 잘 생각해 보라고 해 첫대면을 마쳤다.
나는 이 박사가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하와이에 있는 코리언·캄파우드에서 잠시 교사로 있을 때부터 그의 제자였던 관계로 그를 잘 알고있었던 터이지만 이때처럼 근엄한 그의 표정을 본 일은 일찍이 없었다.
결국 이 박사의 간청에 굴복, 주미대사의 직책을 맡겠다고 하자 이 박사는 내 손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면서 『미국에 가면 우선 우리군대를 양성시켜야 한다는 것과 전쟁으로 시달리고 굶주린 백성에게 먹을 것을 많이 원조하도록 각별히 힘을 쓰라』고 당부했다.
이 박사는 나를 극진히 믿었던 것 같다. 하와이에서 한국기독학원·교회·동지회 등으로 오래 가까이 지냈고 믿음직한 제자라고 보았던 때문인지, 때로『네 말이 내 말이고 네 마음이 바로 내 마음』이라고 말해 나로서는 이 박사를 모시기가 더욱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루는 이 박사·프란체스카 여사·나 이렇게 셋이 저녁을 들고 있는데 「뉴요크·타임스」지 기자가 이 박사를 「인터뷰」하자고 요청했다.
이 박사는 이를 쾌히 승낙하더니 곧 잠 좀 자야겠다면서 침실로 들어가려고 하기에 내가 당황해서 『기자가 곧 오기로 했는데 주무시겠다니요…』라고 반문했더니 이 박사는 태연히 『네가 대신 만나면 내가 만난 것과 똑같지 않느냐』면서 침실로 들어가 버려 할 수 없이 내가 대역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항상 이 박사와 마음이 맞았던 것은 아니다.
한번은 공보부장관에 모씨를 임명하겠다고 이박사가 말하길래 나는 그분의 됨됨이로 봐 너무도 부적격이라고 강력히 반대했다.
그랬더니 이 박사는 『네가 국내사정을 잘 모르고 있는 탓』이라면서 그를 그대로 장관에 임명했는데 1년 후에 귀국해 보니 딴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때 비로소 이 박사는 『네 말이 맞았다』면서 『앞으로 나를 만날 때는 비서실을 거치지 말고 직접 접견실로 들어오도록 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내가 이 박사와 너무 가깝다는 눈치가 보이자 밑에 사람들이 갖은 모략을 했다.
주미대사 때의 일이다.
한번은 귀국을 했더니 이 박사가 대뜸 『네가 귀국하면 야당인사들을 많이 만난다는데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사실입니다. 야당인사 중에는 나와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이 있어 자주 만나고 있읍니다. 그 점이 못마땅하시면 사표를 내겠읍니다』라고 했더니 이 박사는 아무 것도 아니라면서 신경 쓰지 말라고 오히려 위로를 했다.
결국 나는 이 같은 모략 때문에 재직 중 세 번이나 사표를 썼으며 귀국해서도 2주 이상을 머무른 적이 없었다. 끝으로 인하공대 이야기를 하겠다.
이 박사는 하와이 시절부터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갖고있었고 우리 나라가 독립을 하려면 교육과 종교가 가장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런 이박사의 주선으로 그때 하와이에 세웠던 한국기독학원을 이 박사 귀국 후에 내가 팔아 돈으로 가져왔는데 이 박사는 매우 기뻐하면서 이 돈으로 공과대학을 세우자고 했다.
그래서 내가 학교이름을 이박사 호를 따자고 건의했더니 이 박사는 『이 돈이 인천에서 하와이로 이민간 교포들 성금이니 만큼 인천과 하와이의 머리글자를 따 「인하」로 짓자고 해서 오늘날의 인하공대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계속> [제자 윤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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