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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유격전(1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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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구월산 부대>(2)
중공군 개입으로 유엔군이 임진강선까지 후퇴하자 그동안 구월산에 잠입, 준동하던 괴뢰군 1개 연대 병력은 장련·은율·안악·신천·송화·장연 등지를 차례로 기습해 왔다.
이 지역의 반공무장 청년대들은 12월 중순부터 1개여월 동안 구월산의 적 패잔병들과 혈전을 계속하며 고향을 지켰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공산치하』라는 숨바꼭질을 거듭하면서 공산군과 싸우던 이들 반공청년들과 학생들은 개성과 해주가 완전히 적 수중에 들어가자 육로로 남하할 길 마저 막혀버리게 됐다.
자연히 향토단위로 뭉쳐진 이들 반공청년들은 괴뢰군과 최후까지 싸워 전원 전사한 일부 단위부대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웅도·피도·석도·초도·순위도·용호도·창린도·어화도 등 서해 연안섬으로 후퇴해 기지를 구축하고 휴전이 성립된 때까지 게릴라전을 계속했다.

<안악군민 동원해 대병력 가장>
김종벽 대위가 지휘한 연풍부대는 장련·안악·은율·송화·서해리 반도 등지에서 마지막까지 적과 혈투를 벌이다 역불급하여 1951년1월22일 웅도로 건너갔고 일부 대원들은 옛 거점인 구월산으로 다시 들어가 월동을 하며 유격전을 계속했다.
연풍부대는 웅도로 건너가기 전의 전투에서는 구월산 공비와 진남포에서 안악군 서하면 복두나루로 도강해 오는 적 26여단에, 그리고 51년3월 이후의 기습상륙전에서는 적 28사단 및 23여단에 각각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또한 연풍부대 유격대원들은 적치하에서 신음하는 수만의 반공동포들을 구출해 내오기도 했다.
▲임종득씨(당시 구월산부대 대대장·예비역 육군소령·현 연풍공사사장·50) <나는 6·25 직전까지 북괴 내무서에 근무하면서 구월산에 잠입한 고향 반공청년들을 도와주다 연풍부대 기간요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장련 치안서원들이 기간이 됐던 우리 연풍부대에는 평남 강서·황해도 안악·재령출신 반공청년들과 미극동군의 특수부대 요원으로 구월산에 낙하했던 유덕성·김화순 중사 등 우리 공군하사관 4명도 있었어요.
무장은 그간 탈취·노획한 적무기와 강제 징집됐다가 도망쳐온 괴뢰군 출신 대원들이 가져온 것으로 충당했어요.
우리 연풍부대는 전선이 수원 남방으로 내려갔던 51년 1월 중순까지 장련읍을 사수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되자 북괴군과 구월산 공비들은 장련은 그냥 둔채 사리원쪽으로 집결해 내려가고 말았어요. 우리는 유엔군의 재진격을 믿고 사수전을 벌였던 겁니다.
12월23일엔 안악군 서하면 저도리로 우리 유격대를 토벌키 위해 상륙하는 괴뢰군 26여단을 기습, 53명을 사살하고 10여명을 생포했어요.
소제 권총 12정을 비롯한 각종 무기 2백여정도 노획했고요.
낫·도끼 등을 든 안악군민 7백여명에게 후방서 합성을 지르게 해 대병력을 가장하고 공격한 우리대원들은 적의 반격에 일시후퇴 했다가 새벽에 역습을 했었어요. 전투병력을 백명단위의 3개 대대로 확대한 우리 연풍부대는 50년12월31일에는 안악군 온정리에 주둔한 북괴군 1개중대 병력을 기습해 10여명을 사살하고 70여명을 생포했어요.
그리고 51년 1월 6일 밤엔 저도에 상륙해 여단 참모장의 지휘로 교두보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북괴군 26여단 중화기중대를 기습 섬멸했고요.

<일사불란한 통솔력의 여 대장>
몽둥이를 든 1천2백여명의 농민군을 동원해 후방서 함성을 지르게 하고 일제공격을 가해 적참모장 총좌를 사살하고 작전장교 등 38명을 생포했어요.
섬 안에서 기습을 당한 적은 한 명도 도주치 못한 채 문자 그대로 전멸되고 말았지요.
1월8일엔 괴뢰군 26여단 제5대대가 저도전투의 참패를 설욕코자 안악군 서하면 복두리로 상륙했어요.
8일 밤 서하면 무장청년대를 지휘하는 이정숙(고인) 여대장한테서 복두나루를 건너오는 적을 공격하는데 지원해 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나는 이때 구월산의 여장군 이정숙 여사를 처음 봤는데 아주 놀랐어요.
그동안 서하면에 여 대장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30세 미만으로 보이는 이 여사는 70여명의 대원들과 2백여명의 농민응원군을 아주 그럴싸하게 잘 지휘합디다.
하여튼 여대장의 말 한마디면 모두들 설설 길 정도로 대원들을 일사불란하게 통솔하더군요. 전투 중 총알이 마구 날아오는데도 이정숙 대장은 절대로 엎드리는 법이 없었어요.
여 대장은 원래 함남 출신인데 부모와 남편이 모두 반동으로 몰려 옥사하고 자기도 투옥돼 진남포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탈옥해 황해도에와 은신하고 있었어요. 유엔군이 진격하자 앞장서 청년들을 규합한 후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치안대를 조직했다는 겁니다.
이정숙 대장은 수많은 괴뢰군 패잔병과 악질 공산당원들을 잡아 직접 자기 손으로 처단했다고 해요.
복두전투 후 이정숙 여 대장은 대원들과 우리 연풍부대의 제5대대로 편입해 부대중책을 맡아가며 휴전 때까지 함께 싸웠어요.
여 대장은 이런 인연으로 후일 김종벽 부대장의 부인이 돼 남매를 두고 단란하게 살다 59년 병사했습니다.
1월9일의 복두전투에서는 사리원쪽으로 우회해 들어온 적 26여단 제3대대의 배후공격을 받아 서하면 소현리로 철수하고 말았어요. 이 전투에서 적 25명을 사살했으나 우리측도 김두선 대원 등 14명의 동지가 전사하고 이태영 대대장·이신승 중대장 등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매복전술로 적 백20여명 사살>
이날부터 복두반도가 적의 수중에 들어감으로써 우리는 장련·은율·안악 방어선의 교두보를 잃게됐어요.
적은 이때부터 진남포에서 복두로 상륙해 들어와 우리 유격대를 맹공격하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1월 12일 최후방어선인 장련 북방 용포리 전선이 와해되면서 장련을 적에 빼앗기고 은율로 후퇴했습니다.
1월11일 밤 복두반도를 거쳐 들어온 적 26여단 2개대대는 우리 용포리 전선에 강력한 자동화기를 앞세우고 공격을 가해옵디다.
우리는 온정리 전투에서 노획했던 격발기도 없는 76mm 직사포를 못으로 뇌관을 때려가며 접전을 벌였으나 패하고 맡았어요.
12일 아침 우리의 「성역」인 장련을 떠나며 애국 시민들의 피난을 엄호하던 우리 연풍부대의 1개 소대는 한용철 소대장 이하 전원이 전사했어요. 우리를 추격해온 적 26여단 제3, 5대대는 13일 아침 은율 시내에 돌입했는데 우리는 신흥리로 후퇴했다가 적수색병 1개 분대를 섬멸한 다음 야음을 이용해 서부면 이문리로 다시 후퇴했습니다. 14일 아침 우리는 밀집행군으로 추적해 오는 괴뢰군 8백여명을 서부면 대조리에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했어요.
김종벽 대장은 고지에 중화기를 배치하고 전병력을 수로에 잠복시켰어요.
논둑길로 행군해 오는 적이 50m까지 접근했을 때 우리는 일제사격을 가해 1백20여명의 적을 사살하고 1백10여정의 각종 무기를 노획했습니다.
이날 월사리 반도로 거쳐 섬으로 후퇴하던 중 우리 전투에 참가해 분투했던 송화군 석탄 무장대 70여명은 우리와 합류해 제6대대가 됐어요.
우리는 14일의 서부면 전투에서 그간의 패전을 설욕하기는 했으나 배두서·이두섭 중대장 등 대원 30여명을 적의 총탄에 앗기고 말았어요.>
▲이영기씨(당시 구월산부대 부관·현 인천서 토건업·45) <1월14일 은율군 서부면 전투에서 대승한 우리 연풍부대는 17일 패주하는 적을 추격해 장련 탈환전을 벌였습니다.
17일 아침 신준균 작전참모와 이진호 인사참모의 진두지휘로 장련읍을 남북으로 협공, 아침식사중인 괴뢰군 대대본부를 기습했어요.

<천여 피난민 웅도로 무사후퇴>
적에 빼앗긴지 5일만에 장련을 다시 탈환한 기쁨이 채 식기도전 17일 하오 2시쯤엔 도주했던 적이 전열을 정비해서 역습해옵디다.
우리는 적의 포위망 때문에 애국시민들을 모두 데리고 나올 수 없어 대원들만 화천리로 후퇴했습니다.
18일에는 적후방에 고립돼있는 재령무장대 89명을 구출해냈어요.
이정숙 여 대장이 촌부로 위장하고 밤새 백여리 길을 걸어 적지인 서하면에 들어와 있는 재령부대원들을 인솔해 20일 아침 화천리로 돌아왔어요.
화천리서 우리는 또 적의 공격을 받고 격전을 벌이다 서해리 반도를 거쳐 22일 웅도로 건너갔습니다.
화천전투에서는 김종벽 대장이 진두지휘 중 안면과 목에 적포탄 파편을 맞아 부상을 해 이도면 치안대장이었던 박동호 동지가 전투를 지휘했어요.
연풍부대원 7백50명과 피난민 1천여명은 한사람의 낙오자 없이 웅도로 무사히 후퇴했읍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달 동안 훈련을 하며 지내다 백마·송호·수월부대 등과 합류, 구월산부대로 부대명을 바꾸고 적지에 대한 산발적인 기습상륙전을 벌이기 시작했어요.>
◇주요일지 (1951년12월19·20·21·22일)
※12월19일 ▲유엔군사, 유엔군 포로 명단발표 ▲미해병1사단장 존·세루덴 소장신임 ▲제11회 임시국회개회
※12월20일 ▲미8군부사령관에 해리슨 소장신임 ▲휴전감시합동분위, 정돈상태 타개 위해 제원칙의 작성 참모장교회의에 위임 ▲이대통령, 국회개회치사서 개헌안 통과를 요청 ▲이 육참총장, 거창사건 결심에 관한 담화
※12월21일 ▲7사공병대, 「단장의 능선」에 전차도 완성 ▲이대통령·「밴」장군·「무초」대사 공비소탕작전지구 시찰
※12월22일 ▲유엔군사, 일반 시민포로 3만7천명 석방할 것을 발표 ▲포로교환 합동분위, 유엔측 양병포로 즉시 교환요구 ▲국적, 소련과 중공에 적십자대표 북한방문 협조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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