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논쟁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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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

역사에 대한 권력의 관심이 한 달 새에 가파르게 고조되고 있다. 청와대가 국사의 수능 필수과목화를 의제화한 것을 시작으로 집권여당의 ‘국정 국사 교과서’ 공론화에 이어 다시 청와대가 동북아 공동 역사교과서 편찬을 제안했다. 돈과 개발에 대한 이명박 정권의 물신주의에 비하면 박근혜 정권의 역사에 대한 관심과 교양은 분명 돋보인다. 한국사나 중국사, 일본사와 같은 개별 ‘국사’의 경계를 뛰어넘는 공동 역사교과서를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와 협력을 지향하겠다는 의지도 가상하다. 그렇지만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인식론적 차원에서 이 제안들은 역사에는 한 가지 ‘정답’만이 있고 그 ‘정답’은 국가가 공인해야 한다는 발상에서 출발한다. 국가가 주도해 동북아 공동 역사교과서를 만들자는 제안은 ‘국정’ 교과서를 통해 정답을 가르치고 사지선다형 수능 시험을 통해 정답을 찍으면 된다는 발상이 동아시아 차원으로 확대된 결과다. 정답 콤플렉스를 부추겨 국가가 역사 해석을 독점하겠다는 발상이야말로 전체주의 시대 경험의 유산일 뿐이다.

 실제로 그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금성사 교과서와 교학사 교과서 논쟁에서 드러났듯이 국내에서조차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역사의 정답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물며 편협한 국수주의적 역사 해석이 민족주의적 갈등의 뿌리가 되고 있는 동아시아의 현실에서 당사국 모두가 동의하는 공동 교과서를 쓰자는 제안은 아주 순진한 발상이거나 매우 경박한 정치공학의 산물이라 여겨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한편에서는 수능 필수과목화와 국정교과서 회귀 등 국사 교육 강화를 의제화하면서 동아시아 공동 교과서라니 다소 어이가 없다. 나아가 고구려사, 일본군 위안부 등을 둘러싼 과거사 논쟁뿐 아니라 독도나 댜오위다오 등 영토분쟁은 국가가 정답으로 공인한 동아시아 공동 역사교과서를 만든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해 발칸 역사가들의 작업은 매우 시사적이다. 구 유고 내전이 참혹한 인종청소로 막을 내린 직후 이들은 자민족 중심주의의 편협한 시각에서 이웃 민족에 대한 편견을 부추긴 ‘국사’ 교과서를 만든 역사가 자신들이야말로 전범이라는 뼈저린 반성에서 역사 교육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한 첫 작업은 공동 교과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입장에서 쓰여진 사료와 읽을거리를 중심으로 공통의 역사 부교재를 만드는 것이었다. 자민족 중심적인 국사 서술을 상대화하고 발칸 지역 공통의 역사적 경험을 가르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동시에 역사교사 연수 방식에 참신한 변화를 불러왔다. 예컨대 그리스·불가리아·크로아티아·터키의 전문 역사가들이 알바니아 역사교사 연수에 참여해 알바니아의 국가 형성에 대한 이웃의 역사적 시각을 강의하는 식이었다. 한국의 역사교사 연수에 일본과 중국의 전문 역사가들이 참여하는 격이다.

 문제는 역사 해석이 같은가, 다른가가 아니다. 그 다름이 적대적이냐, 비적대적이냐이다. ‘국사’의 민족주의적 주술로부터 해방되면 역사 해석의 차이는 갈등의 원인이 아니라 사상적·정치적 다양성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공동 교과서가 아니다. 트랜스내셔널한 역사 인식이 ‘국사’의 거푸집을 대체할 때 동아시아 공동 교과서는 없어도 좋고 또 없어야 좋은 것이다.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
일러스트=박용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