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휴전회담의 개막<전반부>(16)|군사분계선 논쟁(4)|「6·25」21주…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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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51년 8월 23일부터 10월 24일까지 휴전회담은 열리지 않았는데 공산 측은 8월 22일의 개성 폭격사건을 조작했을 때 휴회가 이렇게 오랫동안 계속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들은 「유엔」군 측이 얼마 안 있다가 다시 회담재개를 서두를 것으로 점치고 있었다. 그리고 군사분계선 논쟁에서도 결국 「유엔」군 측이 양보하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지웨이」사령관은 이번에는 신중을 기하여 개성 아닌 다른 장소에서 회담을 열기로 결심하였다. 「유엔」군 측으로서는 처음부터 개성이 회담장소로서 불편 불리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는데 차제에 다른 장소로 옮기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다.
개성은 전선으로부터 20리나 공산 후방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38선 남방 3리에 놓여 있었다. 「유엔」군 측이 협상하러 공산지역으로 간다는 인상을 주고 38선 이남이기 때문에 은연중에 그들의 38선 군사분계선 제안에 타당한 근거를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서부의 전략적 요충지인 이곳이 회담장소가 됨으로써 「유엔」군은 능력이 있는데도 진격을 단념해야 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여 「리지웨이」사령관은 9월 6일에 김일성과 팽덕회에게 쌍방 연락장교로 하여금 새 회담 장소를 물색케 하자고 제안했다.

<리지웨이 장군, 송현리 제안>
이때 일본과 한국을 방문중이던 미 합참본부 의장 「오머·브래들리」원수도 「리지웨이」안을 허가했다. 그런데 9월 10일에 「유엔」군 측 입장을 난처케 만든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날 공산 측은 미 공군기가 개성 중립지대에 기총소사를 가했다고 주장했는데 조사결과 이는 사실이었다. 「조이」제독은 남일에게 조종사의 실수로 그런 일이 생겼으므로 적절한 제재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공산 측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사건을 가지고 「유엔」군 측이 고의로 중립지대를 침범하면서 회담을 지연시키고 있다고 선전했다. 그리고는 개성에서 즉시 회담을 재개하자고 요구하였다. 그들로서는 개성만큼 회의장소로서 안성마춤인 곳은 없기 때문에 그곳을 고집한 것이다.
그러나 「리지웨이」장군은 9월 27일에 다시 김일성과 팽덕회에게 전선 중간지점인 송현리에서 조속히 회담을 재개하자고 제안하였다. 공산 측은 이 제안을 거부했는데 10월 4일에 「리지웨이」사령관을 다시 송현리가 부적당하다면 귀 측이 선정하고 우리측이 수락할만한 전선 중간지점에서 회담을 열자고 제안하였다. 10월 7일에야 회담장소 이전을 둘러싼 교착상태는 겨우 타개되었다.
이날 김일성과 팽덕회는 처음으로 회담장소의 중립지대규모를 판문점으로 옮기자고 제안해왔다. 그런데 이 판문점은 9월 24일부터 「리지웨이」사령관 제의에 따라 쌍방 연락장교들이 회합해와서 생소한 곳은 아니었다. 공산 측이 그렇게도 고집하던 개성을 왜 양보했는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지적되고 있다. 즉 본회의 휴회동안 「유엔」군은 전선에서 부분적인 『제한공세』를 가했는데 이것이 회담장소 이전에 효과를 보았다는 것이다.
사실 이때 「유엔」군은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에 놓여있어 「워싱턴」의 정치적 고려만 없으면 한·만 국경까지도 진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C·터너·조이」 수석대표도 그의 한국휴전 회고저서 『공산주의자들의 협상수법』에서 『공산주의자들과 협상하는데 있어는 군사적 압력을 가하는 이외의 다른 효과적 방법은 없다』고 술회하고있다.
공산 측은 「리지웨이」사령관이 새 회담장소로 몇 번 제의한 『전선 중간지점』안을 마치 자기제안인 것처럼 내놓았다.

<적, 개성지역 확보하려 간계>
또한 개성서 회담장소를 남하시킴으로써 나중에 지리적으로 큰 이익을 보리라는 것을 계산에 넣었는데 공산 측의 이런 의도는 적중하였다. 여하간 그들은 이렇게 모든 일에 빈틈이 없었다. 공산 측은 또한 이때에 「유엔」군의 군사적 압력이 가중되자 회의장소의 중립지대를 넓히자고도 제안했지만 「리지웨이」사령관은 이를 거부했다. 10월 10일에 쌍방 연락장교는 판문점에서 휴전 본 회담을 열기 위한 준비회담을 시작했다.
이 회의에서 공산 측은 회의장소를 개성으로부터 판문점으로 옮기는데 동의했지만 개성주변 5리의 중립지대는 그대로 존속돼야한다고 주장했다. 10월 22일에 쌍방 연락장교는 다음과 같은 8개 항목에 합의를 보았다. ①판문점을 회담장소로 지정한다. ②회담장소는 1천「야드」반경의 원형지대 안으로 국한한다. ③회담장소에 대해서는 적대행위를 금한다. ④회담장소 안의 주재 병원은 회담 중에는 쌍방으로부터 장교 2명 사병 15명으로 그리고 회담이 없을 때에는 장교 1명 사병 5명으로 제한한다.
⑤쌍방대표들은 회의장 안에서 자유롭게 통행 이동할 수 있다. ⑥시설편의를 제공한다. ⑦개성과 문산 주변 3리과 개성·문산간 도로의 2백m 폭을 중립지대로 규정한다. ⑧회담 재개 시일은 추후 쌍방 연락장교회의에서 결정한다. 10월 23일에 남일은 25일에 회담 재개를 제의, 「유엔」군 측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63일간의 휴회는 끝장이 났다.
결국 회의장소를 옮기려는 「리지웨이」사령관의 생각은 관철된 셈이지만 회담장소 이전에 따른 「유엔」군 측의 득실을 냉철히 따져볼 때 특히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득보다는 실이 컸다고 관계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판문점엔 초가 몇 가옥뿐>
▲정성관씨(당시 서울신문 종군기자·전 내무 차관·현 사업·44) <7월 15일께 「조이」제독은 「유엔」군 측이 회의장소인 개성 내봉장까지의 경의국도에 대한 보수와 경비를 맡겠다고 제의했어요. 문산서부터 개성 남문까지는 「유엔」군 측이, 남천서 남문까지는 공산 측이 각각 담당하자고 했어요. 당시 공산 측의 휴전회담 지휘본부는 개성북방 40리쯤 되는 남천에 있었읍니다.
이 같은 「조이」제의에 공산 측은 즉시 반대하면서 개성서 판문점까지 길을 자기들이 보수 경비하겠으니, 「유엔」군 측은 문산서 판문점까지만 맡으라고 요구하고 나왔어요. 적은 아군 수색지역인 개성지역을 그냥 수중에 넣으려는 저의를 가지고 그런 제의를 한 거지요. 결국 「유엔」군 측이 양보하여 적 제의를 받아들이자 그들은 그 날로 남천에 있던 지휘본부를 개성으로 옮겨놓고 착착 흉계를 꾸몄어요.
공산 측의 이런 흉계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큰 손실을 가져 왔지요. 개성과 장단평야, 김포반도 북부의 임진강 삼각주에 이어진 한강하구를 그냥 적에 넘겨주었으니까요. 「유엔」군 측은 적지인 개성에서 온갖 압박과 불편을 받으니까 회담장소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그들 계략에 말려 들어간 겁니다. 「리지웨이」사령관은 적의 압력이 없는 전선 중간지대에서 회담을 열자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판문점은 개성보다 훨씬 남쪽이예요. 그들은 처음에는 개성에서의 회담재개를 고집하는 체 하다가 판문점에 얼른 응한 겁니다. 이래서 적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개성일대를 그냥 얻게됐지요.>
▲최기덕씨 (당시 합동통신 종군기자·현 사업·53) <처음에 개성을 회담장소로 정해 비무장화함으로써 우리는 큰 손해를 보았읍니다. 회담 전에는 개성은 「유엔」군의 수색지역이었어요. 아군이 고정적으로 점령하지는 않았지만 「탱크」수색대가 드나들고 했으니까요.
회담장소를 다시 판문점으로 남하시킴으로써 대충 계산하여 2만평방km의 개성일대의 땅을 고스란히 적에 넘겨준 거지요. 이거야말로 눈뜨고 도둑맞는 격의 양보였지요. 경제적으로 보아서도 동부전선의 몇 10만평방km에 해당하는 가치가있는 인삼밭과 옥토를 회담장소 선정의 농간으로 빼앗긴 것은 정말 가슴아픈 일이었읍니다.>
한편 새로운 회담장소로 판문점을 선정한 경위에 대해 당시의 「유엔」측 대표 통역장교였던 「리처드·F·언더우드」씨(한국명 원득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회담 장소 이전문제는 쌍방 연락장교회담에 위임되어 양측에서 지도를 펴놓고 적과 아군전선의 중간지점을 찾아 결정한 게 판문점이었어요. 그때 판문점에는 집이라고는 초가가 서너 너더 채 밖에 없었어요.
당시의 판문점 회의장은 지금 남북 적십자 회담이 열리고 있는 곳 보다 5백m쯤 더 북쪽에 올라가 있었어요.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가 지금은 북 한계선이지만 그때는 남 한계선이었지요. 초가가 있는 길 반대편에 1「에이커」쯤 터를 닦고 천막을 쳐서 회의장을 마련했지요. 공산 측은 회담천막을 제공하고 「유엔」군 측은 전기와 난방공사를 맡아서 회의장을 건설했지요.

<판문점에 천막촌 건설>
회의장을 가운데 두고 남과 북에는 쌍방 대표들의 대기 천막을 각각 두개씩 장만 했구요. 공산 측은 회담장소인 중립 지대 안에서는 모든 시설이나 장치를 「유엔」군것과 똑같이 하거나 더 잘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씁디다.
일례로 우리가 대표 대기 천막 옆에 화장실용 천막을 치니까 그들은 목조변소를 짓고, 「유엔」군 초소를 새로 지으니까 그들도 곧 뒤따르고요. 이렇게 아주 사소한 것을 가지고도 그들은 악착같이 경쟁을 벌였어요.>
◇주요일지(1951년 8월 15·16·17일)
※8월 15일 ▲적, 고랑포서 완강히 저항 ▲제25차 휴전회담 무성과 ▲광복절 기념식 국회의사당에서 거행 ▲육군 경리학교 창설 ▲미 정부, 대일 강화조약 원문 발표
※8월 16일 ▲공산 측, 의제 제2항 토의 위한 분위 설치에 동의 ▲이 대통령, 제주도 육군훈련소 시찰 ▲중공, 대일 강화조약 회의에 초청 안 했다고 미국 비난
※8월 17일 ▲미 공군, 적 수송망 24시간 폭격 ▲휴전회담 분위 개최 ▲원내 공화민정·국민회·한청등 각 단체 대표 신당 결성준비 1차 회합 ▲모택동 암살 음모 적발했다고 북평 방송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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