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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누가 이들에게 17년 고통을 안겼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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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최경호
사회부문 기자

17일 오전, 부모는 절에 가는 길이었다. 국립대전현충원 경찰관 묘역에 아들을 화장해 묻고 온 바로 다음 날이었다. 아들을 묻으며 “언제 볼 거나, 언제 볼 거나” 한없이 울던 그들의 목은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김정재(67)·김복임(64)씨 부부. 그들의 아들은 1996년 6월 조선대에서 시위대가 휘두른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아 의식을 잃은 뒤 지난 15일 17년여 만에 숨진 김인원(37)씨였다. 김인원씨가 다친 것은 스무 살 때. 여수대 1학년을 마치고 의무경찰에 들어간 지 5개월이 지나서였다. ‘조선대 총학생회와 북한 김형직사범대 자매결연식’에서 변을 당했다. 두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병상에 누워 있다 결국 숨을 거뒀다.

 아들이 말없이 침대에 누워만 있던 17년간, 부모는 늘 곁에 있었다. 국가보훈처에서 비용이 나왔지만 단 하루도 간병인을 쓰지 않았다. 부부가 때론 함께, 때론 번갈아 병상을 지켰다. 대소변조차 못 가리는 의식불명 환자를 누가 제 자식처럼 간병해 주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부모는 17년이란 세월 동안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며 벌떡 일어날 것만 같았다”고 했다. 코와 위를 연결한 음식섭취용 관을 통해 가물치·뱀장어 등 몸에 좋다는 것은 다 고아 먹여봤다. 남들은 부모에게 “고생한다”고 했지만, 정작 더 힘든 건 의식 없이 청춘을 흘려보내는 아들을 보는 것이었노라고 부모는 말했다.

 어머니는 2~3년 전부터 요통과 고혈압에 시달렸다. 오랜 간병의 후유증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에게 한약을 주며 “우리가 버텨야 하지 않겠느냐”고 다독였다. 대학 행정직원이었고, 1994년 등단한 시인이기도 한 아버지 김씨는 아들을 간병하면서 느낀 애달픔을 담아 『노래하는 새들도 목이 타는가』 등 시집 3권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아들은 떠났다. 아버지 김씨는 “17년 동안이나 함께 있어줘서 고마울 따름”이라고 했다. “부모-자식의 인연이 좀 질긴가. 그걸 끊는 데 17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라고도 했다.

 부모는 15일 숨진 아들을 바로 다음 날 화장했다. 아버지는 그 이유를 “미혼은 2일장으로 하는 게 관례”라고 했다. 그러더니 다시 울먹였다. “스무 살 젊은 놈이 연애를 한번 해봤겠습니까. 국가를 위해 몸 바친 것이라고 저 스스로 자위도 해보지만….”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돌이켜보면 지난 17년은 아들을 조금씩 가슴에 묻어간 세월이었습니다. 부디 우리 인원이 같은 안타까운 청춘이 이 땅에 다시 나오지 않기를. 우리 같은 부모가 다시는 없기를.”

최경호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