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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죄 없는 죄인」…교도관 23년 서울구치소 출정과 김선배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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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죄인이 아니다. 전과도 없다. 그러나 살아온 절반을 붉은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감옥에서 보냈다. 흔히 죄 없는 죄수라 불린다. 요새말로 교도관이란게 그런 생활이다.
서울구치소 출정과-. 줄지은 감방과 철책 하나를 사이한 6평 남짓한 사무실. 햇빛조차 잘 들지 않아 컴컴한데다 감방 특유의 퀴퀴한 냄새에 짙은 소독약내가 풍긴다.
처음 들어서는 사람이면 저도 모르게 얼굴이 찡그려진다.
김선배 교도(44)는 바로 이방에서 23년간을 복역인지 근무인지를 모를 그런 생활을 해오고 있다.
나이보다 조금 늙어 보이는 창백한 얼굴, 몇 해 들어서부터 머리는 희끗희끗 새치가 적지 않다.
검사취조를 받기 위해 젊은 교도보에게 끌려나가던 키 큰 젊은이가 갑자기 놀란 듯 걸음을 멈추고 김 교도에게 꾸뻑 절을 한다.
『꺾쇠, 너 또 들어왔구나. 벌써 몇 번째냐, 이 녀석아…』 절도죄로 구속되어온 젊은이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수갑 찬 두 손만을 비빈다.
얼굴 생김이 대학에 다니는 큰아들과 비슷해 4년 전 처음 구속돼 왔을 때부터 각별한 주의와 관심을 쏟아 지켜봤던 젊은이였다. 첫번 6개월형을 받았을 때는 정기적으로 책을 차입해 주었고 이따금 불러 음식을 먹이기도 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죄수들과는 다른 특별대우를 해주었다.
그런데 벌써 3년째다. 그것도 같은 죄명의 절도죄로-. 세상이 각박해서인가, 사람이 못 되어서인가-.
『그럴 때면 측은한 생각도 들지만 나 자신의 교도업무에 부족함을 안타깝게 느낀다』고 김 교도는 말했다.
3년째 신는다는 뒷 굽이 절반 넘게 닳은 구두에 검은 감색의 제복, 이런 차림으로 그가 회현동의 집을 나서 서울구치소에 도착하는 시간은 아침 7시10분, 가깝지만 두 번이나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거리이다.
곧 출정과의 점검. 검사취조를 받기 위한 형사피의자나 공판정에 나가는 피고인들의 「머리 헤아리기」다. 하루평균 출정인원이 5백명 안팎, 이름대신 번호로 불리는 수감자들은 김 교도 감독아래 엄격한 점호를 몇 번이나 거듭 받는다.
열지어 선 다음에 차례로 앉으면서 번호, 다시 일어서면서 번호. 출정자가 바뀌는 일이 없도록 철저한 점검이 반복되기 때문에 구치소 안에서는 언제부터인지 교도관은 『헤어조진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
이어 출정직원 배치표와 호송표가 작성되면 김 교도는 70명을 태운 첫 「버스」로 법원구내 구치감에 도착한다.
날씨가 좋으면 이때가 하루 중 햇빛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9시30분, 뒤이어 도착하는 6차량의 출정자들을 차례로 인수해서 26개의 출정대기 감방에 나누어 넣고 나면 곧 오전공판에 나갈 피고인들에 대한 점검. 특별한 일이 없으면 대법정을 비롯, 18개의 법정에서 아침 10시부터 공판이 시작되기 때문에 이때가 가장 바쁘다.
법정담당교도관이 정해지고 각자 맡은 인원에 대한 점검으로 또 한차례 소란을 피운다. 특히 「빨간딱지」, 왼쪽가슴에 공안사범표지를 단 반공법위반·국가보안법위반 피고인 계호를 맡은 직원에 대한 주의는 엄중하다.
또 일반 잡범 중 법정에서 자주 행패를 부리는 몇몇 상습전과자들에게는 가죽으로 만든 특수수갑을 채운 뒤 힘센 직원을 딸려 보내야한다.
이렇게 공판준비가 한창 진행되는 동안 검찰 쪽에서도 취조 대상자 호출이 시작된다.
『××호 검사실에 2명』받아 적은 뒤, 감방에 알리며 전화를 놓기 무섭게 또 『따르릉』. 이번에는 『××호실에 5명…』
김 교도의 책상은 마치 큰 작전을 지휘하는 사령실의 그것처럼 각종 배치표·일지·점검부·연출증 등이 어지럽게 쌓인다.
그 바쁜 사이에서도 그의 눈과 귀·두 손이 잽싸게, 잠시도 쉬지 않는다.
낮12시 구치소에서 점심이 도착해도 도시락은 책상서랍 속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이때는 오전공판과 검사실에 불려갔던 피의자·피고인들이 돌아오는 시간이다. 실형을 선고받은 몇몇은 풀이 죽어 어깨가 늘어졌고 집행유예형을 받은 사람은 밝은 표정들.
이들을 다시 감방에 집어넣고 나면 5원짜리 도시락은 싸늘하게 식어 있다.
보리밥에 깍두기 혹은 짠지. 입안이 깔깔한지 도시락에 보다 엽차 잔에 손이 자주 간다.
낮2시 넘어, 오전에 일이 끝난 출정자들을 「버스」에 실어 다시 구치소에 보내면 오후 공판과 검사취조 준비. 4시가 넘도록 불려나가지 못한 몇몇이 감방 안에서 투덜거리기 시작한다. 대질키로 했던 참고인이 나오지 않았든지, 담당검사가 다른 일로 부르지 않으면 이들은 하루종일 좁은 구치감방에서 기다리다 그냥 돌아가야 한다. 이른바 「불러뻥」이다.
5시30분, 법원과 검찰을 두루 돌아다니며 다음 날의 출정인원을 받아 적는다. 퇴근시간이 지났어도 재판이 계속되거나 야간취조가 진행되는 경우는 너무도 많다.
7시30분까지 이들을 기다리다 마지막 「버스」 편으로 구치소에 돌아갈라치면 두 어깨가 나른하다 못해 짓눌리는 것 같다. 눈이 저도 모르게 감긴다. 피곤하다.
23년, 인생의 절반이상을 이렇게 보냈다. 충북 괴산에서 고등보통학교를 나온 그가 서울마포형무소 근처 형 집에 머무르다 금줄 바지에 「사벨」을 찬 일본인 간수를 한때나마 동경했던 것이 17세 때. 21세 때인 49년2월16일 국립형무관학교를 나와 줄곧 서울형무소(서울구치소)에 근무해 왔다.
『한번쯤 이곳을 다녀간 사람 치고 내 손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바깥세상이라야 가족들과 만나는 것뿐이지만 이 속에 앉아 있어도 세상의 만태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쇠고랑을 차고 지나치게 비굴해진 어제의 고관에게서 권세의 무상함을, 공범끼리 서로 헐뜯는 싸움을 벌이는 것을 볼 때 인간이 영악함을, 세태의 매정함을 느끼곤 한다.
재작년 겨울 그가 내보낸 한 소매치기가 새 삶을 찾은 뒤 청자 10갑을 사들고 찾아왔을 때 20여 년의 피로가 풀리는 듯한 보람을 느꼈다. 이 한번의 보람 때문에 그는 23년의 근속에 수당까지 합쳐야 2만7천7백원이라는 보수에 만족한다. 마포구 아현동340의1호 30평 남짓한 낡은 한옥이 전 재산. 4남매 중 대학과 고교에 다니는 2명은 고학으로 자신의 학비를, 그의 봉급은 다른 두 남매 뒷바라지에 절반 이상이 들어간다.
부인 함생수씨(42)가 조그만 구멍가게로 가계를 잇기 때문에 김씨의 복역 아닌 근무가 계속된다.
『세상에 태어나 나와 한번 만나지 않고 사는 것도 큰 행복일 것』이라고 말하는 김씨는 일요일이면 한 주일 동안 부족했던 햇볕을 가득히 쬐는 것이 취미라 했다. <정천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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