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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문제는 당신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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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김진국
논설주간

며칠 전 대학생 딸이 물었다.

 “아빠, 개표 조작 증거라는 것 봤어?”

 “아니. 그런 게 있으면 기사를 썼겠지.”

 “중앙선관위도 인정했다는데? 지금 인터넷에서 난리야. 기자가 그것도 몰라?”

 그러면서 휴대전화로 보여준 것은 개표 집계 문서 사진이다. 페이스북과 인터넷 댓글에 퍼 나르기가 한창이란다. 보여준 페이스북에는 딸이 사진을 퍼 나른 친구와 나눈 댓글이 달렸다.

 “음모론… ㅉㅉ.”

 “그래도 정치를 ㄸ 같이 하는 건 맞잖아.”

 “에일리 문제로 선거부정을 덮으려 한다는 주장이 더 ㄸ이야.”

 “그건 그래….”

 사실을 확인하는 사람은 없다. 논리적인 대화도 할 새가 없다. 그저 인상 토크만 있다. 나도 “그게 사실이면 왜 손석희가 가만히 있고, 야당이 아무 말도 않겠니”라고만 말해줬다. 나중에 얼마나 교묘한 속임수인지 알았지만 사실관계를 분명히 확인 못한 상태에서 더 해줄 말이 없었다. 댓글이 일방적으로 퍼지는 원인도 그런 것일 게다. 선관위도 인정했다는데….

 쇠고기 촛불집회 때가 생각난다. 그때도 고등학생이던 딸의 휴대전화 문자에서 처음 ‘뇌 송송 구멍 탁’이란 말을 알았다. 함께 외식 나간 딸은 불안에 떨며 쇠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고집하고… 그 이후 광우병의 흔적이라도 발견한 일이 있었던가.

 답답하지만 그게 요즘 인터넷 실상이다. 익명성에 숨어 정보를 조작하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공론의 장마저 의욕 과잉의 돌직구가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마당에 골방에 숨어 똑딱거리는 건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자기가 만든 가짜 정보가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걸 보며 ‘당황하셨어요?’라며 낄낄댈지도 모른다.

 정치권은 책임이 없는가. 쇠고기 때는 같이 촛불을 들었다. 터무니없는 소문도 모른 척했다. 요즘 민주당을 봐도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선거 불복’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지만 슬금슬금 비슷한 냄새를 풍긴다. 제1야당 의총에서 대통령 국회 연설에 검은 넥타이 맬 궁리나 하고 있다. 중심도 없고, 리더십도 없다. 강경파에 끌려다니다 지쳐 있다.

 민주당은 101일간이나 천막 생활을 했다. 하지만 천막이 있다는 사실이라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됐나. 애초에 천막을 만드는 이유부터 불분명했다. 민주당 요구사항은 지도부마다 달랐다. 3자 회동이니 4자 회동이니 하며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렸다. 천막 속에서 진을 다 빼고 나왔지만 얻은 것이 없다. 기회가 찾아와도 결단할 용기가 없었다.

 천막을 접자마자 이제 범야권연석회의다. 번번이 큰 목소리에만 끌려다니는 꼴이다. 먼저 타이밍에 문제가 있다. 댓글 사건은 검찰이 수사하고 있는 사안이다. 특검을 동시에 하자는 건 사리에 맞지 않다. 검찰 수사가 끝난 뒤 미심쩍은 부분을 지적하며 나섰다면 오히려 여론을 업지 않았을까.

 정기국회에 묶어놓은 것도 그렇다.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예산안이나 법안 처리를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예산안에 연계해도 납득할 만큼 국민의 공감을 얻고 있는 사안인지 의문이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는 듯 끌고 갈 거라면 차라리 할 일이 산적한 정기국회에 집중하는 편이 현명하다.

 사안의 성격도 모두 국회가 할 일들이다. 특검은 국회가 결정한다. 국정원을 개혁하는 것도 국회가 법을 바꿔야 할 일이다. 더구나 지금이야말로 역대 어느 국회보다 제1야당의 힘이 막강하다. 국회선진화법 덕분에 민주당이 반대하면 과반수를 확보한 여당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런 국회를 두고 장외의 힘을 빌리겠다? 누가 고개를 끄덕이겠나.

 내년 지방선거를 겨냥한 전략일 수는 있다. 하지만 정기국회를 이용해 선거전략의 밑자락을 깐다면 욕먹을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지난 9월 독일총선에서 기민당(CDU)은 전체 631석의 과반에서 겨우 5석이 모자란 311석을 얻었다. 제2당인 사민당(SPD)과 연정협상을 하며 세부 정책까지 조율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보아온 건 의원 빼가기나 소수당에 허접스러운 자리 몇 개 주어서 해결하는 것이다. DJP연합이 그랬고, 지난 총선 야권연대가 그랬다. 나눠 먹기만 있었지 정책연대는 없는 그런 것이다.

 장외단체라면 공격해 이기는 걸 목표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정당은 달라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선 정당들도 상대를 무너뜨리는 데만 골몰한다. 거기에 선거의 승패가 걸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정권을 맡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상대 당의 실수와 실패가 아니라 자신들의 정책과 리더십부터 돌아볼 때다.

김진국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