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공간사옥을 공공의 손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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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사무소 이로재 대표

지난 세기의 건축을 논할 때면 롱샹 교회당이나 라투레트 수도원, 베를린 현대미술관 신관 또는 구겐하임 미술관 같은 작품이 반드시 거론된다. 이 걸작들은 이성과 합리를 내건 모더니즘의 한계를 공간의 힘으로 극복하면서 건축역사를 바꿨으며 그 자체로 이미 20세기의 문화가 됐다. 이는 현대건축 3대 거장으로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70~80세에 만든 역작들이다.

 그러니 건축가가 55세에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요절이 아닐 수 없다. 김수근(1931~86)이 그렇게 우리를 떠났다. 일본에서 건축 수업을 마친 그는 61년 현대건축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이 땅에 혜성처럼 등장해 한국의 현대건축에 새로운 지평을 만들어낸 시대의 건축가였다. 모든 상황이 서구에 한참 뒤떨어졌던 당시에 그는 당대의 세계적 건축 개념과 기술을 그대로 선보이며 자유센터나 한국과학기술원 본관을 지었다. 부여박물관으로 전통 논쟁이 일자 한국성 탐구에 몰입하며 공간사옥과 문예회관, 청주박물관과 경동교회 등 보물 같은 걸작들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당시의 척박한 문화적 환경을 타파하고자 문화예술잡지 ‘공간’을 창간하고 그 토대를 통해 수많은 문화적 성취를 소개하고 담론을 형성했다. 최순우·백남준·박용구·강석희·최정호·소흥렬·박용숙 등 쟁쟁한 문사들이 공간사옥에 모이고 헤어지며 한국의 시대와 문화를 논했다.

 그뿐인가. 공간사옥 내의 소극장 공간사랑을 통해 김덕수 사물놀이를 처음 소개했고 병신춤을 추던 공옥진 같은 지방 예인들을 중앙 무대에 세우는 등 고유한 한국 문화의 적극적 발굴자이자 지원자였다. 그런 그를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서는 ‘한국의 로렌초 메디치(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피렌체의 통치자이자 예술 후원자)’라고 소개했으니 그로 인해 한국 현대문화의 불씨가 지펴졌다 해도 과장이 아닐 게다.

 폭풍 같은 삶을 살던 그가 받은 대가는 55세의 운명이었다. 86년 그가 세상을 떴을 때 많은 이가 “그가 활동한 생전 25년간은 다른 이들의 백 년 같은 삶의 내용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그는 쉽게 잊혀져 갔다. 아니다. 건축을 부동산으로만 아는 우리 사회는 그를 강제로 떼어냈다. 보석 같던 우석대학병원 정문은 아무도 모르는 새 없어졌고 세계 건축가들이 보고 놀라워하던 자유센터와 해피홀은 분탕질되거나 괴기하게 변형됐으며 한국일보 구사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경동교회의 옥상교회는 그 원형이 돌아올 기약이 없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분신인 서울 원서동 공간사옥은 경매에 처할 위기에 직면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미숙하고도 슬픈 경험으로 미뤄 언젠가 이 건축도 사라지고 그로써 김수근도, 그가 일군 지난 시대의 문화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공간사옥은 한국 현대건축의 자존심이다. 늘 선두에 거론돼 왔다. 한국의 건축가들은 물론 세계의 건축가들에게도 그렇다. 건축을 아는 이라면 모두가 이 건축이 가진 놀라운 공간의 힘에, 한국성의 표현에, 탁월한 섬세함에, 그리고 그 드라마틱한 조직에 탄복하고 경외한다. 더구나 김수근이 뿌린 문화의 향이 너무도 깊고 짙게 배어 있어, 이는 단순히 한 건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문화다. 그런데 부동산 매물로 회자되다니…. 이 초라함이 아직도 우리가 안아야 하는 초상인가.

 제안하겠다. 지난 시대 우리의 문화 생산지였던 이 건축을 이제 공공의 장소로 변환하기 위해 공공에 귀속되도록 하자. 부디 국립이든 시립이든 건축박물관으로 전환해달라. 그렇게 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고자 한다. 김수근에게 진 빚 때문만이 아니다. 이 시대에 만연한 야만성과 천박함을 그래도 바로잡고자 하는 문화의 힘이 우리에게 있을 거라 믿는 까닭이다.

승효상 건축사무소 이로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