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휴전회담의 개막<전반부>(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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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미국이나 「유엔」은 한국정부의 휴전반대 태도를 처음에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과 「유엔」은 바로 대한민국 수립에 산파적 역할을 했으며 공산침략을 막는 전쟁에서는 「유엔」군이 주력이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이 감히 맞서지 못할 것이며 또한 그런 힘도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더우기 7월14일의 작전권 이양으로 「유엔」군 총사령관은 한국군의 고삐를 단단히 쥐게되어 누가 보아도 한국은 옴짝달싹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사방이 벽인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전개한 휴전반대 투쟁의 전략과 방법은 이승만 대통령이 거의 홀로 구상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이 사실을 입증하는 당시의 세 측근자와 장관들의 이야기.

<대통령 홀롤 전략·방법구상>
▲백낙준씨(당시 문교부장관·현 연세대명예총장·77) <「말리크」제의에 따라 「유엔」과 미국에서 한국정전 문제에 대해 설왕설래하자 처음에 우리 정부는 사태를 예의 주시하는 태도를 취했어요. 미국은 회담방식이나 개최일자 등을 일체 비밀로 하고 우리에게는 전혀 알려주지 않았어요. 그러더니 미국은 양측 군사령관끼리 정전회담을 열어 한국전을 휴전시킨다는 회담방식을 취한다고 발표하더군요. 미국의 그런 공식태도가 정해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반대성명을 발표하고 북진통일을 주장했어요. 물론 정략차원도 많이 가미된거지요. 국무회의에서 더러 정부의 휴전반대 태도를 논의하긴 했어요. 그러나 그 회의에서는 이 대통령이 이미 결정한 휴전반대 결정에 동의하고, 구체적인 반대투쟁 방법 같은 것만 논의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국무회의에서 휴전찬반을 논의한게 아니라 이 박사가 결정한 기정사실의 실천방안을 토의했을 뿐이지요. 듣기로는 대통령이 몇몇 인사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구했지만, 거의 독자적으로 결정했답디다. 한국정부의 휴전반대 태도가 하도 강경하니까 미국의 여러 요인들이 설득하러 왔어요. 그러나 오히려 이 대통령으로부터 번번이 설득 당하고 돌아갔읍니다.
이 박사는 한국인 모두가 휴전을 반대한다는 결의를 보이기 위해 궐기대회나 가두행진도 시키도록 했구요. 물론 시민이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이런 시위에 참가했는데 학생「데모」는 1952년 여름께부터 절정에 달했을겁니다. 군대에도 휴전에 반대토록 지시한 것으로 알지만 한국군은 「유엔」군사령관의 작전권 하에 있기 때문에 시위나 별다른 행동은 취하지 못했지요.>
▲윤석오씨(당시 경무대 비서관·현 사업·61) <휴전회담에 대한 대통령의 근본입장은 절대반대였지만 사실 「맥아더」원수의 해임과 더불어 이박사의 북진통일 노선은 허구화 한거지요. 내가 보기에도 이 박사가 정말 아끼고 존경한 미군 장성이나 미국인은 「맥아더」원수 뿐인 것 같았어요. 첫 환국할 때 동경에 들러 「맥아더」를 만났더니 한국의 38선을 누가 만들었느냐고 묻더래요. 모른다고 하니까 아주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랍니다. 그러니까 원수는 당초부터 38선에 대해 근본적으로 불찬이었고 북괴가 남침하자, 차제에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을 성취하려고 한거예요. 박사와는 완전히 일치되는 정치노선이지요. 「맥」원수가 해임외자 박사의 실망은 컸고, 내심으로는 북진통일도 체념하는 눈치입디다. 한국군 측의 휴전회담 대표문제만 해도 「유엔」군 사령관이 누구를 선정하든 상관치 않겠다는 태도였어요. 특히 박사는 개최에 주도적 역할을 한 영국정부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어요.< p>

<맥 원수 해임되자 「북진」체념>
이것은 휴전회담이 거의 막바지에 들어갈 무렵인데 「덜레스」국무장관이 직접 이 대통령을 설득하러 왔다가 오히려 혼난 적이 있어요. 대통령은 「덜레스」장관을 오찬에 초대했어요. 오찬이라야 간단한 한식으로 밥에다 반찬은 미역국·김치·조기·김뿐이었어요. 단둘이 앉아 1시간30분 동안의 오찬시간을 휴전회담에 대한 미국공격으로 시종했어요.
결론은 「왜 당신네들은 영국 꽁무니만 따라다니며, 군사력에 있어 월등 우위에 있는데도 한국통일의 기호의 기회를 포기하느냐」는 것이었어요. 「덜레스」장관은 하도 조리 있는 공격을 받으니까 점심도 제대로 못 들고 연방 땀만 닦다가 일어납디다.
그후 「월터·로버트슨」국무차관보가 또 왔는데 잘 상대도 안했어요. 「리지웨이」사령관도 이따금 와서 휴전회담에 대한 본국 정부 입장을 전달했지만 어떤 때는 들은척만 척하고, 때로는 면박도 주면서 항의도 합디다. 그러면 「리지웨이」대장은 『각하의 항의는 「워싱턴」에 전달하겠다』면서 슬금슬금 물러나더군요. 이 무렵에 대통령이 미국고관을 대하는 태도는 우리가 보기에도 민망하고 아슬아슬할 정도로 격한 고자세였지요.>

<한국전 확대로 핵전쟁 우려>
▲임병직씨(당시 「유엔」대사·현 국토통일원 고문·78) <내가 「유엔」대사로 있던 51년6월23일에 문제의 말리크 제의가 나왔어요. 당시 전세는 「유엔」군측에 상당히 유리했읍니다. 본국 정부로부터 실현되지 못하도록 「유엔」 각국 대표를 설득하라는 훈령이 왔어요. 이승만 대통령은 소련제의는 이미 기진맥진한 적에게 시간 여유를 주기 위한 음모에 불과하니,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대하라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한국참전 16개국은 모두가 휴전제의에 찬성하는 뜻을 보이고, 특히 미국과 영국은 꼭 휴전을 성취시키겠다는 태도입디다. 바로 1년 전에 침략자에 대해 단호했던 「유엔」분위기와는 아주 딴판이에요. 정말 한심스럽더군요. 나는 「유엔」미국대표인 「워런·오스틴」 「어니스트·그로즈」 「찰즈·로즈」등과 여러 번 만나 휴전회담에 반대토록 설명했으나 「워싱턴」정책이 휴전하기로 정해져 도리가 없다는 겁니다. 한국전에 개입은 했으나 양극을 이루고 있는 미·소 관계와 세계추세로 보아 쌍방의 세력균형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승리 없이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어요. 그들은 또 만약 한국전쟁이 더 계속되고 확대되면 핵전쟁으로 번질 우려가 있어 현재 상태에서 불을 꺼야 것이었구요.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은 그때는 소련이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았어요.
알다시피 소련이 처음으로 원폭을 실험한 것은 휴전회담이 개최된 후인 1951년10월3일이니까요. 미국이 소련의 원폭제조 사실을 미리 탐지하고, 지레 핵전쟁을 겁냈는지는 모르겠어요. 여하튼 나는 미·영 두 나라를 비롯한 참전국대표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우리 입장을 실명하고, 또 「유엔」총회와 정치위원회 등에서 여러 차례 휴전반대의 발언도 했어요. 이 대통령의 지시대로 전쟁에서 유화정책을 써서는 안되며 강대국인 미국이 약소국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다고 했어요. 그리고 전쟁터에서는 이기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휴전제의에 응하느냐고 따지기도 했구요.
그러나 당시 미국은 세계 양대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는 소련과의 관계를 고려하고 또 영국의 압력 때문에 우리 주장을 받아 주지 않습디다. 그때의 영국태도는 정말 괘씸했어요. 한국전쟁에 1개 여단의 지상군과 군함도 몇 척 보내면서도 중공 개입 후부터는 사사건건 「워싱턴」을 견제했으니까요. 외교는 원래 영국의 교활성은 정평이 있는 것이니까 「트루먼」은 번번이 「애틀리」에게 말려 들어간거지요. 영국의 근본태도는 미국이 「아시아」에 치중 못하게 하는 한편 그때 벌써 중공과의 상거래를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결국 대세는 우리 정부의 고군 분투에도 불구하고 휴전회담 개최로 기울어졌지요.

<우리 대표, 협정문서 조인 거부>
그러나 우리 정부는 회담이 개최된 후에도 꾸준히 반대운동을 계속했습니다. 하도 휴전반대투쟁이 거세니까 53년5월에는 「아이젠하워」대통령이 이 대통령에게 담판을 짓자는 강경한 서한을 보내기도 했어요. 그러나 이 대통령은 조금도 굴치 않고 끝내 우리 주장이 묵살된다면 단독으로라도 북진하겠다고 회답했어요. 결국 휴전은 성립됐지만 우리 대표는 협정문서에 조인도 하지 않았고, 이 대통령의 반대투쟁으로 최대한의 국가이익은 쟁취한 셈이지요. 미국인 중에도 우리 입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많았어요. 그 일례로 이것은 내가 당시의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W·클라크」대장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인데 그는 문산에서 휴전협정에 조인하고 동경에 돌아가 부인 앞에서 통곡했다는거예요. 역대 미국 장성 중에서 승리없이 휴전에 조인한 것은 자기가 처음이라고, 이런 수치가 어디 있느냐면서 울었다는 겁니다.>

<국가안전과 이익 보장받아>
한편 한 군사평론가는 휴전회담 개최의 배경과 이 대통령의 반대투쟁전략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김점곤씨(당시 1사단12연대장=대령·예비역육군소장·현 경희대교수·49) <한국 정부는 근본적으로 전쟁을 계속해서 「유엔」군의 군사점령에 의한 남북통일을 갈망했기 때문에 휴전회담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거지요. 그러나 51년7윌 당시의 한국전 상황으로는 쌍방이 다같이 휴전으로 문제를 해결할 도리밖에 없게 되었어요.
「유엔」참전국의 보조가 맞지 않게 되었고 여기에다 미국내의 여론과 52년10월의 대통령선거도 앞두고 해서 더욱 휴전기운이 촉진됐지요. 공산측은 그들대로 군사력의 한계점을 인식하고 정치적 타결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됐구요. 이승만 대통령의 휴전반대투쟁은 일견 무모한 것 같지만 실은 현실적인 모든 여건을 계산에 넣은 단계적인 치밀한 정략에서 나온 겁니다. 대단히 수가 높은 외교솜씨였지요. 제1차적으로는 무조건 반대였고, 제2차적으로는 휴전을 묵인하는 대신 국가의 안전과 이익에 대한 최대한의 보장을 받아내려는 것이었지요.

<한·미 방위조약 등 결실보고>
이점은 한·미 방위조약, 한국군의 증강, 장기적인 경제원조 제공 등으로 결실을 보았읍니다. 그리고 휴전선은 최소한 현 전선에 그어 우리가 38이북으로 올라가 있는 전 지역을 확보하려고 했어요. 이런 계산에서 처음에는 평양·원산 선을 요구했는데 이것은 우리가 최대한 양보하더라도 현 전선으로 휴전선을 긋자는 속셈이었던거지요. 요는 우리 요구조건은 「워싱턴」의 의사와 어떻게 타협, 일치점을 찾을 수밖에 없는 제한적인 것이었지요.>
◆주요일지(1951년7월19, 20, 21일)
※7월19일 ▲지상전투 소강상태 ▲7차 휴전회의 무진전 ▲국민방위군사건언도 ▲「애치슨」국무, 휴전 후에도 미군 불철수 언명 ▲양유찬 대사, 대일강화조약 문제에 관해 국무성에 항의 제출.
※7월20일 ▲휴전회담 홍수로 중지 ▲이 대통령 INS통신에 휴전반대 태도 천명 ▲「요르단」의 「알두라」왕 피살.
※7월21일 ▲휴전회담 8차 회의, 공산측 25일까지 휴회요구 ▲「몰로토프」소 부수상, 「티토」원수를 맹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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