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현진건의 옛집, 그리고 쓸쓸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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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며칠 전 이른 아침 환갑을 갓 넘긴 소설가이자 서울문예인 유적보존회 대표인 오인문 선생과 길을 동행했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사무소를 끼고 인왕산 자락을 따라 주택가 골목을 걷는 느낌이 유난히도 따스하게 여겨졌다.

5분쯤 갔나 싶었는데 길 오른편으로 수백년 먹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다가서니 담장 안으로 쓰러질 듯한 낡은 기와집 지붕이 드러났고 대문 옆에 '현진건 집터'라는 표석이 서 있었다.

문득 1926년 빙허(憑虛) 현진건(1900~43) 이 발표한 '그의 얼굴'(나중에 '고향'으로 바꿈)이라는 제목의 단편소설 한 구절을 떠올렸다. "썩어 넘어진 서까래, 뚤뚤 구르는 주추는! 꼭 무덤을 파서 해골을 헐어 젖혀 놓은 것 같더마."

"누가 공사를 시작하려나? 지난해만 해도 이런 것 없었는데…." 집 담장을 둘러친 공사용 울타리를 보며 오선생은 이렇게 말문을 연 뒤 "서둘러 손을 쓰지 않으면 이 집도 윤동주 하숙집, 최남선 고택 등과 마찬가지로 곧 헐릴 것"이라고 말했다.

"집 자체가 문화재로서 보존가치는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를 한국 사실주의 문학의 상징적 산실로 삼아 기념할 필요는 있거든요…."

낯선 사람의 발자국과 약간 커진 말소리 때문인지 동네 개들이 연이어 짖어댔다. 오선생은 얘기를 이어갔다. "6년 전 이 집을 처음 찾아 종로구에서 발행하는 '종로사랑'에 소개해 상당한 반향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 집을 보존하는 문제에는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이 매년 6월 '율리시스'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 기념관으로 변하는 의미를 되새기지 못하는지 모르겠다"고 아쉬워했다.

행정구역 상으로 서울 종로구 부암동 325의2는 빙허 선생이 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에 연루돼 1년간 옥고를 치르고 나와, 닭을 치며 역사소설 '무영탑' '흑치상지'등을 집필한 곳이다.

집 바로 뒤, 세종의 3남 안평대군이 권력싸움에 밀려난 뒤 풍류를 가까이하며 살았던 무계정사 유적이 있는 것도 역사적 의미를 더한다.

어디 빙허 현진건을 기억할 만한 곳이 있을까. 43년 폐결핵으로 타계해 화장된 빙허의 유해는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서초리(지금의 서울 서초구 일대)에 묻혔으나 강남지역 개발 바람에 사라졌다. 소설 '빈처'의 산실인 서울 관훈동 52 고택의 경우 지번조차 없어져 위치를 확인하기 어렵다.

그가 태어난 대구쪽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주소 상으로 빙허의 생가는 지금의 빌딩가인 현 대구매일신문사 부근이라는 사실만 짐작케 할 뿐 정확히 어딘지 가늠할 수 없다. 남은 자취라곤 대구 두류공원 한쪽에 서 있는 문학비 하나가 고작이다.

서울시는 수년 전 두 차례에 걸쳐 이곳을 시 지방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검토했지만 아무런 결정을 못내렸다. 표석 하나라도 남긴 게 다행스러울 정도다.

오죽하면 오인문 선생이 인근 고급음식점 주인에게 이 집을 사들여 보존하면서 '술 권하는 사회'(현진건의 대표작 제목)라는 술집을 내라고 제안했을까 싶다.

돌아오는 길, 갑자기 소설 '운수좋은 날'의 마지막 대목이 통곡으로 울려퍼지는 듯했다. 그날 따라 인력거꾼 남편이 수입을 많이 잡고 흥을 내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정작 아내가 싸늘한 주검으로 놓여 있는 장면과 이어지는 부분이다.

"설렁탕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지하의 빙허에게 진짜 운수좋은 날, 그 날은 언제일까.

허의도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