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미전야㉯>
이 박사는 비서들에게 필요이외의 정담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산책에 함께 따라 나섰을 때면 이따금 심경을 말하곤 했다. 「하지」를 『바보 같은 장군』이라고 맞대놓고 욕해준 뒤라고 생각된다. 이 박사는 돈암장 뜰을 거닐다 내게 『공산당이 문젯거린데 미군정에선 날더러 공산당과도 손을 잡으라니 될 법이나 한 얘긴가』라면서 『하지가 사령관이니 제 맘대로 하게 내버려두면서 달리 방도를 찾아야겠어』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이 박사는 하지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좌우의 합작을 추진하던 미군정으로선 어떻게 하든 이 박사 중심으로 좌우가 손잡도록 만들어야겠다는 것 때문에 끈질기게 이 박사를 찾았다.
하지는 이 박사와 만나고 싶다는 전갈을 계속 보내왔다. 이런 때면 3∼4주일만에 한번쯤 마지못한 듯 얼굴을 내밀었다.
이 박사는 하지를 돈암장으로 오게 하지 않고 하지관저인 경무대를 찾아갔다.
하지도 오랜 기간의 설득 끝에 발걸음을 한 이 박사에 대해 정중하려고 애썼다. 이 박사 승용차가 경무대현관에 닿으면 「하지」는 뛰듯이 달려나와 마중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의례적인 말이 끝나 하지가 본론을 꺼내면 이 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뒷짐을 지고 서서 창문 밖 경무대 뒷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는 그런 이 박사의 등뒤에서 열심히 그의 얘기를 했다.
듣는 것도 안 듣는 것도 같이 서있던 이 박사는 하지의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후딱 뒤 돌아보며 『이봐, 윤 비서 우린 가세』하고 나와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는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고.
어떤 땐 그래도 기분이 좀 내키면 얘기를 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뒤끝은 충돌.
『장군, 전쟁얘기를 하면 나보다 나을 것이니까 내가 귀담아듣겠지만 정치도 모르는 사람이 더우기 남의 나라에 와서 당신 마음대로 하겠다는 거요. 당신네는 나라도 생기기전에 우리는 이미 4천년 역사를 가지고있는 나라였다는 걸 인식하시오.』
『역사가 있다해도 지금 현실에선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당신 하자는 대로 해보았으나 안되지 않았소. 당신 얘기는 더 들을 수도 없소이다.』
하지와의 대화가 단절된 이 박사는 결국 도미를 결심, 은밀히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지」에게 보복을 당했다.
『귀관은 이승만 박사가 도미한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나?』『처음 듣는 얘깁니다, 각하.』『도대체 CIC는 뭣을 하고 있느냐 말이야. 이박사가 도미할 준비를 모두 끝낼 때까지 그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단 말이요. 내가 있는한 그는 미국에 가서는 안되고, 갈 수도 없어.』
이 박사의 도미소식을 사전에 알게 된 「하지」사령관은 사령부소속 CIC대장을 불러 일찍 탐지하지 못했다고 힐난하면서 이박사의 도미를 봉쇄토록 지시했다.
다음날 아침 CIC촉탁으로 있는 이순용이 동산(윤치영)과 함께 돈암장으로 이 박사를 찾아왔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지가 박사님의 도미봉쇄를 명령했습니다.』
『고약한 자 같으니. 그자는 공산당과 매 한가지야. 「하지」가 날 미국에 못 가게 한다고 내가 못 갈 사람인줄 아나. 내가 미국에 가는 것은 독립운동 하러 가는 건데 우리의 독립운동을 막는 자는 모두 우리의 적이야. 그런 자는 이 땅에서 쫓아 보내야 해.』
그러나 하지의 도미봉쇄는 철저했다. 그때 미국엘 가려면 며칠만에 있는 NWA항공기나 아니면 군용기를 얻어 타고 가야했고 그마저 안되면 선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지」는 군용기는 물론 NWA민간항공회사에까지 이 박사에겐 절대로 자리를 내주지 말도록 엄하게 지시를 내려두고 있었다. 이래서 이박사의 방미계획이 벽에 부딪쳐 있을 때 그러니까 46년10월쯤으로 기억되는데 동경의 「맥아더」사령부에서 장성이 한사람 서울을 다녀갔다. 이 장성이 이 박사와 면담할 기회를 갖게됐다.
『장군, 나 12월초에 도미할 예정이요. 비행기 자리가 연말까지는 꽉 차있어 자리를 얻을 수 없고…, 배로 인천에서 떠날 수밖에 없다는구먼.』
『배로 가시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동경에 돌아가서 비행기편을 마련해 보겠습니다.』며칠 후 동경에서 비행기를 준비해뒀다고 연락이 왔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하지」는 이곳에서 비행기를 주선해 주겠다고 동경에 연락을 하고 돈암장에도 『곡 그 비행기가 아니더라도 여기서 주선할 테니 떠날 준비를 해 두라』는 전갈을 해왔다.
그래놓고도 「하지」는 『비행기가 뜨려해도 일기가 나쁘다』는 등 구실을 붙여 하루 이틀씩 2주일이나 끌었다.
하루는 연락병이 와서 나에게 『당신, 왜 말랐느냐』고 농담을 하기에 『당신 상관 「하지」가 애를 먹여서 그렇다』고 했더니 『God damned』이라고 욕을 하고 갔다.
연락병이 오는 것은 정말 이박사가 떠날 작정인지 초초한 나머지 다시 동경에 무슨 연락을 하는 건지 등 동정을 살피고 오라는「하지」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이걸 안 이 박사는 초조한 빛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방안 가득히 한서를 비롯하여 각종 책을 펼쳐놓고 뭘 쓰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해서 태연을 위장했다. 이 박사의 여행준비라야 몇 개의 문서와 미리 준비한 돈을 넣은 조그만 손가방뿐이었으니 비행기가 마련됐다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채비를 숨겨두고 있었다.
연락병은 몇 차례 탐색을 왔다가 늘 변함이 없는 이박사의 이런 생활을 보곤 『지금 당장이라도 떠날지 모르는데 어떻게 하려고 준비도 갖춰놓지 않았느냐』고 오히려 당황해했지만 이 박사는 못 들은 체 책만 읽고 있었다. <계속> 【윤석오】계속>방미전야㉯>
(381)-제자는 필자|<제26화>경무대 사계(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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