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중공 수교의 막후 인물|파리 주재 중국인 신부 위청심과의 회견기|파리=장덕상 특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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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로마」 교황청은 교황 「바오로」 6세와 모택동과의 회담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탄자니아」 수도 「다르에스살람」에 있는 교황 사절을 통해 중공과 정기적인 접촉을 하고 있다고 최근 「이탈리아」의 ANSA 통신이 보도했다. 양측간의 이와 같은 활발한 정기적 접촉은 12월초 「바오로」 6세와 회담한 「파리」 주재 중국인 신부 위청심씨 (68)가 최근 다시 「로마」를 방문한 이후 더욱 빈번해졌다고 ANSA 통신이 보도했다. 기자가 「파리」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만큼 허술한 위 신부의 단간 「아파트」 방으로 찾아갔을 때 위 신부는 교황청 고위 관리들과 「바티칸」·중공 관계 정상화를 토의하고 「파리」로 귀임한 직후였다. 「바티칸」 중공 수교 교섭 진행 상황 및 전망에 관한 위 신부와의 일문일답은 다음과 같다.
장=교섭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위=1964년, 「프랑스」가 중공을 승인한 이래 「바티칸」에 중공과의 수교 가능성이 타진돼 왔다. 그러나 교황청의 반응이 냉담하여 1966년부터 『교황청과 중공』 (4백「페이지」)이란 책을 쓰기 시작, 대 중공 관계 정상화의 필요성을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시켜 왔다.
장=신앙의 자유가 없다는 중공과 현 단계에서 교황청이 수교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위=중공 헌법 88조에는 분명히 「신앙의 자유」가 규정돼 있는데 두 법의 적용이 잘 되고 있느냐는 둘째 문제이고 첫째는 원칙 문제이다.
장=지난가을 「프랑스」 의회 사절단을 수행, 취재하고 온 「르·몽드」지의 「로베르·길렝」 기자와 「르·피가로」지의 「막스·올리비에·라캉」 기자 등은 모두 중공의 교회가 문이 닫혔다고 하던데….
위=나도 그런 기사를 읽고 놀랐다. 그러나 지난 11월 중공을 방문한 「이탈리아」 의원들의 보고는 다르다. 「가톨릭」 신자인 「콜롬보」 의원은 11월20일 주북경 「이탈리아」 대사관 직원 및 몇몇 중공 신도들과 북경의 어느 「가톨릭」 성당에서 「왕·키·팅」 주교가 집전 하는 「미사」에 참여했다 한다. 「왕」 신부는 그 교회가 중공 신자들을 위해 매일 열린다고 했다고 한다. 「문혁」이전엔 중공의 모든 교회는 문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문혁 동안엔 「가톨릭」은 물론 신교·불교·구교 등 모든 교회의 문이 닫혔다.
그러나 문혁이 끝난 뒤 몇몇 성장이 문을 열었다는 정보가 있고, 특히 「아랍」권과 관계를 맺고 있는 중공이라 회교 사원은 많이 열렸다고 한다.
장=중공의 「가톨릭」 교인과 교회 수효는?
위=전 인구의 0·5% 정도다. 문혁 이전엔 1백46개의 교구에 65명의 주교가 있었다. 그중 20명은 「로마」 교황청에서 서품을 받았고, 45명은 48년 중공 정권 수립 후 교황청과는 관계없이 중공 교구에서 임명된 주교들이다.
장=「바티칸」이 중공과 수교한다면 중공에서 「가톨릭」의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리라 생각하는가?
위=당장은 어렵다. 그러나 「바티칸」이 중공과 접근함으로써 교회 문제가 더 이상 악화되지는 앓으리라 생각된다. 불치의 중환이라도 치료해 보는 것이 의사의 사명이다.
이런 정신에서 중공의 교회를 살리기 위해 「바티칸」은 중공과 국교를 수립해야 하지 않나 싶다. 교회를 살리는 길은 이길밖에 없다.
장=수교 모색의 방법은?
위=나는 중개 역할을 한다기보다 「바티칸」으로 하여금 수교의 필요성을 인식시킬 겸 해서 5년만에 다시 교황청을 찾아 의중을 타진했던 것이다.
장=「바티칸」은 호의적이던가?
위=그렇다. 「바티칸」은 대화의 마련을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찾고 있다.
장=중공과의 접촉 방법과 중공의 의중은?
위=문혁 전엔 중공의 교회 및 여러 기관과 통신 연락이 잦았는데 문혁 후에는 좀 어려웠다.
중공이 「바티칸」과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정치적으로 「바티칸」을 이용할 가치도 없다. 중공은 수교를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라는 태도이다. 그래서 나는 「바티칸」이 「이니셔티브」를 잡아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장=이와 관련하여 대결과의 문제는?
위=대만이 가장 큰 문제이다. 중공은 「바티칸」 이 정담과 국교를 맺고 있는 이상 「바티칸」과 수교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다소 시간은 걸리겠지만 나는 「유고」 「불가리아」 소련 등 공산권과의 수교와 성공한 「바티칸」이 결국은 중공과도 수교할 것으로 확신한다. 나는 희망을 갖고 「로마」를 떠나왔다.

<20년 전부터 프랑스에 체재>
1903년 상해의 전통적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위청심 신부는 한때 일본 「싱가포르」 등지에서 5년간 기자 생활을 한 경력도 있으며 20년 전에 「프랑스」에 왔다. 지난 61년 『1842∼56년간 「프랑스」의 중국에서의 포교 정책』이란 논문으로 「파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4년 「프랑스」가 중공을 승인하자 중화민국과 관계를 끊고 중공 여권으로 경신한 위 신부는 65년 「프랑스」에서 서품을 받고 현재 「파리」의 「셍·미셸」 성당 부사제로 봉직하고 있다. 그의 「아파트」에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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