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만원으로 '움직이는 집' 만든 사카구치 교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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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구치 교헤는 “얼마나 큰 평수의 집이면 사람들이 만족할까”라고 물었다. 그는 “몸 하나 의지할 사과 상자 크기면 충분하다는 걸 노숙자들과 집을 지어보며 깨달았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단돈 3만엔, 우리 돈 30만원 가량으로 ‘움직이는 집’을 지었다. 주인 없는 땅의 공유를 주장하는 신정부(Zero-public.com)를 수립하고 초대 수상에 취임했다.

건축학과를 나왔지만 ‘짓지 않는 건축가’를 자임한다. ‘사람=돈’, 사람 스스로가 돈인 경제정책을 연구한다.

작가·화가·뮤지션·코미디언으로 활동하면서 서로서로 재능과 생각을 교역해 ‘0엔’으로 살아가는 ‘0엔 특구’를 구상 중이다.

 특이한 이력의 일본 청년 사카구치 교헤(35·坂口恭平)는 강력한 언명에 비해 의외로 부드러웠다. 쉼 없는 노동을 강요하는, 이른바 피로사회를 거부하고 당신만의 독립국가를 만들라고 말하는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집과 땅을 빌리는 데 왜 그렇게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하나’ ‘빈집들이 넘쳐나는데도 끊임없이 새 건물을 짓는 이유는 뭘까’ ‘헌법에서 생존권을 보장하고 있는데 노숙자들은 왜 이리도 많은가’라고 묻는 방법 자체가 예술이다. 상식을 뒤집어 업고, 관점을 헤집어 새 길을 여는 걸음걸음이 경쾌해서 저절로 따라가고 싶어진다.

 제5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10월 30일~11월 5일)에 초대받아 다큐멘터리 ‘모바일 하우스 제작기’를 선보인 그는 자신을 ‘온화한 무정부주의자’라고 소개했다.

 “저는 사회를 바꾸자고 말하지 않아요. 완전히 다른 세계가 있다고 제시하지요. 현 시스템으로는 인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정부와 싸우거나, 땅을 점거하는 게 아니죠. 빈 토지에 움직이는 집을 지어 놓고 생활하다가 나가라 하면 또 다른 공간을 찾아 이동합니다. 그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대처하지 않는 것이 멍청이가 되지 않는 비법이죠. 삶의 방식은 무한합니다. 새로운 태도경제를 창조하세요.”

 ‘모바일 하우스 제작기’가 보여주듯 ‘움직이는 집’의 기본 개념은 최소한의 주거공간을 만들어 어느 곳이나 공터에 가져다 놓고 생활하다 또 다른 빈 땅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집은 침실에 불과하다. 이웃한 공원이나 지하철역에서 화장실과 수도를 쓴다. 도서관은 책장이고, 슈퍼마켓은 냉장고인 셈이다.

 “저는 이런 동네를 ‘한 지붕 아래 도시’라고 이름 붙였어요. 집만이 주거 공간의 전부는 아니죠. 도시 전체가 큰 집이라 보면 전혀 다른 소유개념이 생기면서 자유로워집니다. 삶과 세상을 이해하는 무수한 층위(層位), 레이어(layer)가 생깁니다. ‘야생의 사고’라고나 할까요.”

 사카구치는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기존 정부와 기득권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을 새삼 깨달았다. 이를테면 안도 다다오(安藤忠雄) 같은 스타 건축가가 이야기하는 건축 철학은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건 결국 돈과 권력, 탑-다운(Top-down)의 사고방식이 한정한 세계라고 비판한다.

 “‘손’을 쓰면서 구체적으로 생각하며 사는 유일한 사람들이 노숙자였어요. 그들은 돈을 위해 집을 만들지 않아요. 동물의 둥지처럼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가장 순수한 형태의 집을 짓습니다. 자기를 지키고 살아남을 수 있기를 주장하는 것이 제가 세운 신정부의 가치관이죠.”

 사카구치의 최대 지지 세력은 청소년들이다. 전국에서 ‘움직이는 집’을 짓겠다며 문의하는 중고생들이 그에겐 희망이다. 조금씩, 한걸음씩 변하는 세상을 위해 그는 조용히 최선을 다한다.

 “후지 텔레비전의 인기 프로그램 ‘마츠코 딜럭스’에 고정 출연하고, 내년 1월 1일 저녁 9시 NHK 라디오 특집 방송에 나가는 건 완전히 다른 각도로 미래를 건설할 그들을 응원하기 위해섭니다.”

 그는 새 후계자가 나오면 언제든 신정부의 수상 자리를 내놓겠다며 “한국 청소년도 가능하다”고 동참을 바랐다.

글=정재숙 문화전문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사카구치 교헤=1978년 일본 구마모토 현 출생. 와세다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노숙자들의 주거 형태를 담은 사진집 『0엔 하우스』 출간. 2006년 캐나다 밴쿠버주립미술관에서 첫 개인전,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구마모토에 후쿠시마에서 피난 온 사람들을 위한 ‘제로 센터’ 건립. 『나만의 독립국가 만들기』(이음), 『ZERO에서 시작하는 도시형 수렵채집생활』(쿠폰북) 등이 국내 번역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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