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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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목사란 직책이 말을 하도록 강요당하는 직책이기 때문에 언제나 무엇이든지 말을 해야한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 교사들이 어떻게 설교해야하나 하고 하나같이 고민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평화」와「희망」을 설교해야 합니다 고 주장하고 또 실천도 하고있다. 그래서 근자에 나는「평화주의사관」이란 것을 내걸어 보고 있다. 그 동안 너무 역사의 흐름의 말초에 사로잡히지나 않았나 해서 이제는 역사의 흐름의 기초가 되는 정신적 지평을 조금 정리해야하겠다고 느껴져서이다.
흥미로운 것은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고, 근자에 우리네 지성들이 대개 그와 갑이 흐르고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역사표면에 나설 수 없이된 지성이 그 힘을 뻗칠 하나의 새로운 탈출구를 찾고 있는 것이라고도 해석된다. 한가지 바라고 싶은 것은 우리의 지성에는 좌절의 상흔이 너무 깊이 박혀 탁월한 우리민족성 형성에 실패하여 오지 않았는가 생각되기 때문에 역사흐름의 더 깊은 정신적 지평을 찾는다고 해서 좌절로 끝마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다.
그러기위해서는 역사의 본류에 굳게 서서 나의 사관이 결국 승리를 거두게된다는 확신에 선 전수자의 사명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민족의 정신적 지평을 어디에다 잡아야할까, 전쟁과 평화의 틈바구니에 낀 우리로서, 평화로써 어떻게 전쟁을 이길 수 있는가를 심각하게 생각지 않을 수 없다. 「평화주의사도」이 생각되는 것도 이런 처지에서이다.
전쟁과 평화는 같은 차원에서는 것 같지 않다. 전쟁과 전쟁이 맞서는 차원이 따로 있고 평화와 평화가 맞서는 차원이 또 따로 있다. 여기서 결국우리는「평화의 정신적 차원」을 잃어 버려서는 안되겠다는 결론이 나오게된다. 흥미로운 것은 2차 대전 이후에 어느 힘도 평화를 표방하지 않는 힘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언제나 너무 낙관적이란 비난을 받아오고 있지만, 인류는 반드시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고야 말 것으로 보고 있다. 합리·자유·평화의 시대는 5백년 전에 시작되었고, 지금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단계에 온 것으로 본다. 물론 가만히 앉아 있어서 온다는 것은 아니다. 나의 낙관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언제나 좌절이 깔려있다. 『마시기나 합시다』라는 것이 마지막 말이 되곤 한다. 나는 이 좌절이 싫기 때문에 악관을 부르짖게 된다.
기독교에서는 사람의 좌절과 하느님의 성공을 가르쳐 오고있다. 그러나 그「하느님의 성공」이 역사적 현실이라고 보는 미친 사람들이 예수이후에 얼마나 많이 나타났는가. 이 미친 사람들의 묘지가 로마근교 지하 묘지에 10만장이나 있지 않는가! 이 미친 사람들이 한때는 길을 잘못 들어서 큰 권력도 장악해 보지 않았는가. 평화에의 확신, 이새로운 정신적 지평, 이것이 오늘 우리민족에는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한철하<장로회 신 대 교수·철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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