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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빌리·브란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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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차 대전 후 독일 문제는 세계 평화에 대한 위협 요소였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한 「빌리·브란트」의 노력은 「유럽」 뿐 아니라 전 세계의 평화 질서에 기본적인 기여를 했다.』
이는 브란트 서독 수상에 대한 71년 「노벨」 평화상 수상 이유이다.
전후 냉전 질서에서 해빙으로 이르는 길목에서 가장 큰 장애물로서 상징되던 「베를린」 문제 해결을 비롯한 소련·동구와의 관계 정상화를 모색한 브란트의 노력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70년의 독-소 조약 체결은 2차 대전의 전쟁 당사국인 서독과 소련 사이에 평화 조약이 없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또 분단 독일의 현실을 최초로 받아들인 최초의 서독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브란트의 결단은 전진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브란트로 집약되는 서독의 「오스트·폴리티크」 (동방 정책)는 이런 뜻에서 동·서 해빙의 징검다리의 역할을 해냈다.
한편 서독의 「오스트·폴리티크」는 대외적으로 서독 외교의 유럽 대륙으로의 복귀를 뜻한다.
유럽 대륙 최대의 경제 거인으로 성장하고서도 서독은 50, 60년대에 NATO를 중심으로 한 미·영·불 중심의 외교에 이끌려왔다.
그러나 「오스트·폴리티크」로 통칭되는 서독의 대 동구 외교 공세는 미·영·불의 손길을 차례로 뿌리치고 독자적인 통로를 마련함으로써 경제적 거인=정치적 거인이라는 관념을 도식화하고 있다.
서독의 경제력으로 뒷받침되는 이러한 정치적 거인으로서의 발돋움은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독일의 견제 세력으로 대표돼 온 영국·「프랑스」로 하여금 경계의 눈길을 돌리게 하고있다.
영국을 늘 EEC 문턱에서 되돌아서게 하던 프랑스의 태도 변화는 서독 견제를 위한 영· 불의 공동 전선 형성의 뜻을 지닌다.
60년대 미·소 평화 공존 체제의 최대 위협이었던 독일 문제의 궤적은 바로 동·서 냉전의 역사였다. 「이데올로기」로 분장, 합리화되어 오던 냉전의 논리는 동·서 양측에 군비 경쟁의 구실을 주어왔다.
그러나 브란트에 의해 추진된 「오스트·폴리티크」는 「이데올로기」의 냉전 논리가 「내셔널리즘」의 위장 수단이었다는 점을 선명히 드러내 주었다.
서독의 동구 접근 과정에서 빚어진 소련의 동독 이익 희생, 미·영·불의 은근한 대 서독 불신에서 이런 사실이 뒷받침된다.
소련 측으로서는 몰론 서독과의 교섭에서 예상외의 양보를 했다고 하나 이는 내외적인 여건에 의해 강제된 것이었다.
중·소 분쟁에 따른 소련의 서부 국경에서의 불안은 「유럽」을 안정화시켜 동·서 양정면에서의 긴장을 피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또 낙후된 국내 경제 수준의 향상에 서구로부터의 기술 협력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서독과의 화해는 소련의 이러한 사정에 따른 자국 이익 확보를 위한 타산적 귀결이다. 여기에서 「이데올로기」상 동질성의 『동맹국』을 어느 정도 『서럽게』 하는 것쯤은 가벼운 희생이다.
한편 서방측으로서도 서독의 동구를 향한 『독주』는 불안스러운 것이었다. 서독의 분단현실 인정은 독일 민족의 비대화를 두려워하는 「유럽」인들에게 내심 바람직한 일이기는 하지만 서독 경제의 소련·동구 진출은 그리 달가운 일이 되지 못한다.
40년 「히틀러」와 「스탈린」의 독-소 상호 불가침 조약이 동구에 대한 군사적인 「갈라먹기」 조약이었던데 대해, 70년의 독-소 조약은 동구에 대한 서독의 진출을 소련이 『양해』하여 양국이 동구를 경제적으로 「갈라먹기」로 야합했다는 비판도 있다. 이는 영·불을 비롯한 서구 제국에 『독일 제국』에 대한 악몽을 되새기게 한다.
서독은 이러한 의구심에 대해 이는 열강 각축 시대의 19세기적 세력 팽창 논리에 적합한 것이라고 반론을 편다.
서독의 「오스트·폴리티크」에 대한 각국의 정략적 평가가 어떻든 동·서 화해의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지난해의 독-소 조약을 계기로 금년 말 매듭 지어진 「베를린」 문제의 해결은 동·서간의 과중하고도 불 필요한 군비 경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었다.
NATO·「바르샤바」 동맹군의 상호 감축 협상, 「유럽」 안보 합의 개최의 전제 조건이 「베를린」 문제 해결이었던 것이다.
지난해의 독-소·독-파 조약을 고비로 한동안 잠잠했던 브란트의 동방 정책은 지난 9월 매듭 지어진 「베를린」에 관한 4대국 협상을 계기로 다시 「유럽」 외교 무대의 전면에 나서고 있다.
9월의 브란트의 소련 방문, 「체코」와의 국교 정상화 교섭, 11월의 「셸」 외상의 소련 방문 등 서독 외교의 대 동구 파상 공세는 「오스트·폴리티크」의 확대라기보다는 서독 독자 외교의 전개이다.
브란트가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의 회담 후 『이제 서독은 서구 제국과 함께 동·서 교류에서 대등하게 활동하게 됐다』고 발언한 것은 바로 정치적 소국 서독의 『정치적 복권』 선언이라 할 수 있다.
브란트-브레즈네프의 공동 성명은 유럽 안보 회의 개최, 주「유럽」 병력의 감축에 서로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서독의 이러한 새삼스런 「제스처」는 「달러」 방위에 급급하고 있는 미국이 「닉슨·독트린」을 내세워 강행할 서독 주둔 미군의 감축에 대한 경계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31만명의 유럽 주둔 미군 중 21만명이 서독에 주둔, 서독 안보에 절대적 비중을 차지해 왔다. 따라서 미군이 철수하기 전에 앞질러 소련과 교섭하여 미리 서독 안보의 길을 다져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 브란트의 「오스트·폴리티크」는 대내적으로 「베를린」 협상을 타결로 이끌어 서독 정부가 서「베를린」에 대해 제한적이기는 하나 『특권』을 얻어내는데 성공케 했다.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동독으로 하여금 「울브리히트」의 완고한 보수주의에서 탈피하여 융통성 있는 통치 체제로 전환할 수 있는 자극을 주기도 했다.
독-소 조약 체결이래 동독도 불만이기는 하나 악착같은 서독과의 대결 의식에서 공존의식으로 탈바꿈의 과정을 모색한 흔적이 엿보인다. 동독은 「울브리히트」 퇴진이래 과도한 서독과의 경쟁적 경제 계획을 수정, 국민 생활을 풍족히 해줄 소비재 생산에도 눈을 돌리게 됐다.
이는 바로 서독뿐만 아니라 전 독일인을 위해 「오스트·폴리티크」를 추진한다는 브란트 구상의 부수적인 효과이다.
서독의 이러한 다방면에 걸친 외교 활동은 영·불 중심 유럽 외교의 서독 중심으로의 전이를 예고한다. 브란트의 외교 활동은 경제 거인 서독으로 하여금 유럽 외교 무대에서 풍성한 『정치의 계절』을 맞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김동수 기자>

<차례>
①닉슨·키신저
②모택동·주은래
③「레오니드·브레즈네프」
④「빌리·브란트」
⑤히드·퐁피두
⑥좌등 영작
⑦라만·간디·「야햐·칸」
⑧「대니얼·엘즈버그」
⑨「살바도르·아옌데」
⑩「글로리어·스타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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