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꾼 이자람 일당백 ‘소리’ 서양 고전 빛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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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호 24면

늦가을, 대한민국 연극계에 고전 바람이 거세다. 명동예술극장의 ‘바냐 아저씨’, 국립극장의 ‘단테의 신곡’에 이어 예술의전당의 ‘당통의 죽음’까지-. 연극 애호가라면 놓칠 수 없는 무대를 국내 대표 공연장들이 속속 내놓고 있다. 원전에 충실하거나(바냐 아저씨), 연극과 창극과 오페라를 뒤섞거나(단테의 신곡), 시공을 초월하거나(당통의 죽음), 스타일과 지향점은 제각각이다. 하지만 서양 고전 텍스트에 2013년 한국의 시대정신을 불어넣으려 가장 고민한 작품은 루마니아 연출가 가보 톰파의 ‘당통의 죽음’으로 보인다.

연극 ‘당통의 죽음’, 11월 3~17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당통의 죽음’은 독일 리얼리즘의 선구자 게오르크 뷔히너(1813~1837)가 프랑스 혁명 이후 공포정치 시대 권력자들의 대립을 그린 작품. 훗날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탄생시킨 혁명적인 주제와 형식으로 시대를 한 세기나 앞선 걸작으로 평가된다. 2011년 셰익스피어 ‘리처드 3세’의 혁신적 연출로 국내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가보 톰파는 여기에 오늘의 시대상과 판소리의 양식미를 엮어 역시 시대를 앞서가는 세련된 무대언어를 빚어냈다.

원작의 중심축은 급진 좌파 로베스피에르 일당이 온건 좌파 당통 일당을 단두대로 보내는 과정의 첨예한 대립. 그런데 프랑스 혁명을 논하는 무대 위 인물들이 어쩐지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을 닮았다. 혁명의 피비린내에 지친 ‘강남 좌파’ 당통 일파의 멋스러운 고가 수트는 클래식 정장을 갖춰 입은 급진주의자들에겐 ‘유시민의 아메리카노’만큼이나 용납할 수 없었나 보다. ‘당통 단두대 보내기’는 민생 현안은 제쳐놓고 밥그릇 사수를 위해 소모적인 정쟁과 정적의 ‘모가지 딸’ 궁리만 하는 딱 요즘 정치인들의 초상이다. 혁명 당시 정치 상황을 묘사하는 빠르고 복잡한 대화를 못 알아들어도 상관 없다. 무대는 만사에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현대인의 이분법과 인간적 딜레마로 시선을 모을 뿐 당대의 시공간은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공도 당통이나 로베스피에르가 아니다. 대립의 한가운데 선 군중이다. 무대를 열고 닫는 것부터 이름없는 군중을 대표하는 소리꾼 이자람이며, 법정드라마에서 배심원 역할을 해야 하는 것도 객석에 희미하게 켜진 불빛과 함께 어느새 작품의 일부가 된 관객이다. 그러나 대립을 방관하며 이리저리 선동될 뿐인 군중은 결국 어떤 권리도 행사할 수 없는 주체 아닌 주체다.

도심 한복판 빌딩 숲 유리벽과 철골 구조를 형상화한 무대장치는 그런 현대인의 겉과 속을 투영한다. 콩나물 시루 같은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시민들의 영상과, 당통이 무대 위에서 스마트폰으로 찍는 상대 배우의 영상을 교차시킨 연출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서로 실체를 보지 않고 기계를 통해 소통하는 현대인들의 습관을 여과 없이 비춘다. 인간의 문명이라는 위험한 바벨탑이 결국 서로에 대한 이해와 소통을 거부하는 위태로운 관계를 만들어낸 것은 아닌지 묻는 듯하다.

오케스트라 피트를 비롯해 무대 곳곳에 리프트가 오르내리며 만들어내는 다양한 미장센엔 위트가 넘친다. 감옥에 갇힌 당통 일파의 복잡한 내면을 강렬한 조명 속에 마치 현대무용의 한 장면처럼 표현한 안무나 거창한 세트 없이 객석을 향해 목만 조르르 내민 창의적인 단두대 처형 장면은 무릎을 치게 한다.

하지만 이 참신한 무대의 일등공신은 단언컨대 소리꾼 이자람이다. 그의 연기엔 단순한 멀티맨이 넘볼 수 없는 소리꾼의 재치와 리듬이 살아 있었다. 비장한 울림으로 민중가요를 부르다 돌변해 비루한 하층민들의 대책 없는 어리석음을 실감나게 연기하는 그의 ‘국보급’ 활약이 없었다면 이 무대는 앙꼬 빠진 찐빵이었을 터. 수십 명의 배우가 필요한 거리극의 인간군상을 대체할 카드로 단 한 명의 소리꾼을 선택한 톰파의 혜안이 놀라웠다. 리얼리즘의 전통에 익숙한 서양인들은 동양 예술의 초현실적 양식미에 전율하지만, 서양 고전에 창극의 형식을 가미한 기존 작품들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부채 하나 손에 들고 몸뚱이 하나로 수많은 감정과 다양한 갈등을 섭렵하는 판소리 자체가 독보적인 공연양식으로 해외의 러브콜을 받는 데 비해 연극이라는 장르 속에서는 아직 고유의 양식미를 구축하지 못한 탓이다.

‘소리도 되고 노래도 되는’ 전천후 광대 이자람이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당통의 죽음’은 우리 전통예능을 현대 극예술 형태로 살리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듯하다. 드라마터그 안드라스 비스키는 이자람을 만나 판소리를 연구하다 “인물들의 삶과 욕망, 관계의 복잡성에 깊이 천착하는 셰익스피어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현대 극형식을 발견했다”고 한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우리 전통 예능의 양식미에 대한 더 적극적인 해석과 재창조가 논의되어야 하는 이유다. 그것이 세계적인 무대언어가 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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