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조사단 피습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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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거창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밝혀지고 관련자들이 군 재에 회부되어 처벌을 받기까지는 꼭10개월이 걸렸다. 그 동안에 이 사건이 국회에 비화하여 조사단이 구성되고 이조사단이 현지로 가다가 위장공비의 습격을 받는가하면 급기야는 국방·내무·법무의 세 장관이 해임되는 등 파란곡절이 많았다. 그럼 먼저 처음에는 단순히 「통 비 분자처단」이라고 보고된 이 사건이 어떻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는가를 관계자들 증언을 통해 살펴보겠다.

<"사건현장 가보시오" 두 번 투서>
▲최경록씨(당시헌병사령관=준장·전 육군참모총장·예비역중장· 현 주영대사·51·주=일시 귀국했을 때 회견) <국민방위군사건으로 한참 여론이 들끓고 내가 수사책임자로서 골치를 앓고있을 때인데 괴상한 투서가 헌병사령관 앞으로 날아들었어요.
내용은『거창군 신원면 대현리에 꼭 한번 가보십시오』라고 밑도 끝도 없이 간단한 것 이예요. 그때 그 지역은 공비가 창궐해서 위험했어요. 그래서 홍순봉 이익흥 윤자우씨 등 헌병 사 참모들과 상의했더니 공비가 나를 유인, 가해하려는 것 같다고 해요. 이분들 의견을 따라 묵살했더니 며칠 있다가 또 같은 내용인데『왜 그렇게 겁을 먹습니까. 어서 한번 가 보십시오』라는 투서가 왔어요. 내용을 검토해본 결과 내 주변에서 보내는 편지 같아요. 그래서 이강대 소령을 현지에 파견했습니다.
이 소령은 자세히 조사하고 사진까지 찍어 왔는데 5백70여명의 불탄 시체더미예요. 그 중에는 상당수의 부녀자와 어린이·노인도 있고요. 나도 직접 현장에 가서 이 소령의 조사내용을 확인했습니다.> 최경록 사령관이 현지로 갈 때는 신성모 국방을 비롯하여 육본의 일부 고급장교도 동행했다. 국방부로서는 첫 현지 답사였는데 이때 동행한 헌병 사 장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윤우경씨(당시헌병사제2처장=중령·전 치안국장·72) <51넌 2월 하순쯤 거창에서 주민이 많이 처단됐다는 정보가 헌병사령부에 들어왔어요. 당시 최경록 사령관은 이것을 사건화 해야겠다고 신 국방에게 상신 했으나 승인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국회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고 헌병 사에서 몇 번 요청하니까 신 국방이 그러면 한번 현장조사를 해보자고 했어요. 아마도 3월 중순께로 생각되는데 신 장관과 최경록 사령관 그리고 그 밖의 몇 분이 신원면 현장으로 갔습니다. 처단장소라는 산기슭의 계곡으로 가서 내가 흙을 파보니 불에 탄 시체가 나옵디다.
겨울이라서 그랬는지 얕게 묻었더군요. 한참 더 파보니까 부녀자와 어린이시체도 몇 구 나와요. 신 장관도 그것을 보더니 너무나 처참하게 느꼈는지 손을 저으며 이제 그만 파라고 합디다. 내 생각에도 그때 어린이 시체만 안나왔어도 거창 사건이 그렇게 크게 문제되지 않았을 겁니다. 헌병 사에 들어온 첫 정보는 약1천명이 살해된 것으로 돼 있었는데 현지조사결과 군인 경찰가족 등 5백여 명을 제외하고 5백여 명이 죽은 것으로 나타났어요. 거창 경찰서에서 나는 주로 경찰관계자를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했는데 그들은 군대입장을 옹호하면서 사건발생이 불가피했다고 하더군요.
즉 경찰에서 공비토벌작전계획을 세우면 몇 시간도 안돼 공비와 내통한 주민들의 연락으로 들통이 난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일부주민은 공비에 식량을 공급하는 등 여러 가지 편리를 제공했다고 합디다. 현장조사이외에는 나는 직접 관련자들을 심문하지 않고 사령부의 김진호 대위가 주로 다루었어요.>
국방부의 현장조사에는 2명의 여성도 동행했는데 그 중의 한 여 군 장교는 당시의 현지 주민동태에 대해 주목할만한 증언을 하고 있다.

<이박사가 누군 지도 몰라>
▲김현숙씨 (당시여군부장=대령·현 국회의원·56)<3월 중순께 갑자기 국방부서 들어오라는 전화가 왔어요. 가보니까 지리산주변의 공비출몰지역에 계몽을 나간다면서 당시 대한부인회회장이던 김철안 여사와 함께 차에 타라고 합디다. 앞자리에는 최경록 사령관이 타고 우리 둘은 뒷좌석에 앉아서 갔어요. 신 국방과 육본의 몇 장교도 함께 갔습니다.
가면서 최 사령관과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 받아보니까 거창 사건의 현지조사를 가는 거 더군요. 사건현장에서 약30m 쯤 되는 곳에 가더니 국민학교 마당으로 들어갑디다. 교정에는 인근부락사람들은 모두 모아 놓았어요.
우선 최덕신 11사단장이 나와 우리일행에게 이 지역의 공비 준 동 상황과 농민들 현황에 대해 간단한「브리핑」을 합디다. 그리고는 나하고 김 여사는 여기서 모인 주민들에게 계몽 강연을 하고 애국가를 가르쳐주라고 하면서 나머지 일행은 현지로 떠나데요. 모인 마을사람들은 모두가 남루한 옷차림에다 고무신을 신은 사람도 없어요. 광목바지에 짚신이고 더러는 나무로 깎아만든 신을 신기도 했어요. 그리고 이승만 박사가 누구냐고 물어보아도 잘 몰라요. 그런데도 김일성은 알고있어요. 그러니까 공비들의 선전을 그대로 알고있을 뿐,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는 거지요. 물론「라디오」나 신문은 생전에 구경도 못했고요 .애국가를 부르며 따라 부르라고 하니까 한사람도 부르는 사람이 없어요. 자세히 알아보니, 물론 살기 위해서겠지만 말단 행정관리들도 대부분 공비와 내통하고있는 눈치였어요.
나는 이 세상에 이렇게 무지하고 대한민국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한 곳이 남한 안에 있는가하고 새삼 놀랐습니다.

<대한민국의 통치권 안 미쳐>
2시간동안 마을 사람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고 계몽연설을 하고 나니까 현장에 갔던 분들이 돌아옵디다. 함께 돌아오면서 차안에서 현장에 갔던 사람들끼리 오가는 이야기를 귀 너머로 들으니까 피살된 주민들 가운데는 어린이와 노인들도 있다면서 몹시 침울한 표정이더군요.
나는 내 나름대로 생각해봤어요. 물론 그렇게 무지한 주민들 중에는 공비에 협조한 사람도 있을 거고 더러는 입산하여 공비가 된 청장년도 있었을 거예요.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못 미치는 그런 지역에서는 자의적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러니까 근원적인 책임은 정부에 있다는 생각이 듭디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갔던 나는 대구에 돌아와서야 사건내용을 대충 알았고 진상전모는 군 재를 방청하고서야 파악했습니다.>
여러 관계증인과 자료를 검토 종합해보면 거창 사건에 대해서 처음에는 국방·내무·법무의 세 곳에서 각각 독자적으로 조사에 착수했다. 국방부는 앞서 말한 신 국방 일행이, 내무부는 장영복 경무관이, 그리고 법무부는 부장급 검사2명이 각각 사건을 조사했는데 세부의 조사내용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여기에는 다분히 정치적 요인도 작용했었다. 신성모 국방 실각을 노리던 조병옥 내무와 김준연 법무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처음부터 이 사건을『양민학살』 각도에 조사한 반면에 신 국방은 그렇지 않은 방향에서 사건을 마무리하려고 했던 것 같다. 결국 세 장관은 이문제로 대통령의 진노를 사 제명 및 해임됐는데 이 문제는 나중에 다루겠다.
다음은 이 문제가 국회에 비화하게 된 경위를 관계자들로부터 들어보겠다.

<국회의원 6명과 함께 확인>
▲신중목씨(당시 거창 출신 2대 국회의원·전 농림장관·현 국민당간부·69) <1년2월 하순께 거창군 신완면에서 많은 주민이 학살됐다는 제보가 들어왔어요. 나는 지리산 가야산주변 공을인 장성·남원·광양·산청·함양 등의 출신국회의원 변진갑 이병홍 노기용 박정규씨 등 6명을 개인적으로 소집했어요.『내 고을 거창엔 이런 정보가 있는데 당신네 고을엔 무슨 소식이 없소?』했더니 다들 숫자는 다르지만 그런 사건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각자가 자기고을로 내려가서 확인하고 올라와 종합, 국회에서 문제삼기로 합의했어요. 내가 거창에 갔더니 문제의 신원면 쪽은 작전지역이라 해서 얼씬도 할 수가 없어요. 경찰서의 유봉순 사찰주임을 만났더니 6백80명의 피해자명단과 사진을 보여주면서 설명해 줍디다. 사진에는 끔찍한 장면이 많았어요.

<끔찍한 사진복사 끝내못해>
사진을 복사한다니까 부산 계엄사령부의 엄명으로 절대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명단은 베꼈어요. 부산에 돌아와서 각각 자기 출신 구에 조사 갔던 다른 국회의원들과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들 지역에도 피해자 숫자는 적지만 거창과 비슷한 사건이 더러 있었다고 합디다.
다같이 국회에 보고해 문제삼자고 했더니, 『지금 군인들이 우리주의를 총 들고 감시하는데 정신나간 소리 말라』면서 고개를 흔들어요. 이날 서대신동의 집으로 갔더니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서성거리고있어요. 겁을 주자는 거지요. 나는 범일동 친척집으로 가 숨었다가 3월29일에 등원하면서 결심했습니다.
대뜸 등단해서 비공개회의를 요청하고 거창 사건진상을 보고했어요. 그랬더니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이 극도로 흥분해 명패로 책상을 치고 고함을 치다가 흐지부지 해산이 됐어요. 이튿날 내가 국회현지조사단구성을 제의해 통과됐어요. 조사단은 김종순(단장) 박정규 변진갑 이병홍 김정실 김의준의원, 그리고 나, 이렇게 7명이 선출 구성됐습니다.>
◇주요일지(1951년4윌23, 24, 25일)
※4월23일▲적, 금화남방전선에 대거침투▲미군공병대, 한탄강 교량폭파▲한일통상협정체결▲이시형 부통령, 국민방위군처우개탄성명·
※4윌24일▲적, 고랑포에서 대공세▲미 극동공군사령관「스트레이트·메이어」장군, 만주폭격필요성강조▲이 대통령, 거창 사건 책임지고 국방·내무·법무장관사임권고·조 내무사표제출▲「리지웨이」장군, 한국전선 시찰코 동경귀환
※4월25일▲「유엔」군, 서부전선에서38선 이남으로 철수 ▲「밴플리트」사령관 일대 결전 박두했다고 휘하장병에 격 ▲김준연 법무사임 ▲국회, 국군l0개 사 증설가결 ▲서울잔류시민에 철수 령(6·25후 세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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