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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제자는 필자|<제22화>부산 통화 개혁(1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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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에필로그」>
9일간의 긴급통화조치 실적은 구권 예입 액, 금융기관 시재금, 국세 등의 국고 불입을 포함한 총액이 1조2천2백62억 원이었다. 이중 구권 예입 액은 조치 실시 직전인 2월14일자 화폐 발행고 (1조1천3백67억 원)의 97%인 1조1천65억 원에 달했고 회수되지 않은 화폐가 3%인 3백2억 원이었다. 예치선별로는 구권 신고 예입 액이 총 예입 액의 92%(1조1천2백5억 원), 금융기관 시재금이 3%(4백6억 원), 세금 등 국고 불입액이 5%(6백51억 원)를 차지했다.
구권 신고 예입액 중 현금으로 직접 교환 지불된 금액은 전체의 67·4%였다. 통화 조치가 일반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알 수 있다.
금액별 구권 예입은 소액인 3백만원 미만이 72% (8천38억원)로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고 3백만원 이상 5백만원 미만이 4% (4백92억원), 5백만원 이상 1천만원 미만과 1천만원 이상 2천5백만원 미만이 각각 5%, 2천5백만원 이상 5천만원 미만이 4%, 5천만원 이상 1억원 미만이 3%였고, 1억원 이상의 신고분은 전체의 7%에 이르러 예상보다 현금 편재 현상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주한 화교에게도 거액의 화폐가 퇴장되고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결과는 의외로 적었다.
부유층과 화교들이 조치 기간 중 분산 예입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신고 예입금의 지역별 분포는 9개 도시(부산·서울·대구·대전·인천·광주·목포·전주·청주)가 전체의 42%를 차지, 화폐의 도시 집중 현상이 역력했다. 통화 조치가 끝난 2월25일 현재 예금고는 2·14 이전의 기존 예금 45억7천만 환과 조치 기간 중 예입된 구권 예금 계정분 43억7천5백만 환을 합친 89억4천5백만 환이었다. 이중 76%인 67억원은 자유계정으로 풀려 나가고 나머지 21억원이 체납 국세 납부, 금융기관 연체 대출 반환, 봉쇄 계정 등으로 흡수됐다. 그래서 이 통화 조치에 의한 실질적인 구매력의 봉쇄 율은 24%에 지나지 않았다.
통화 조치의 성과는 조치 후의 사후 대책에 좌우되는 것인데 가장 시급한 것은 물가 억제였다. 정부는 제1차적인 시책으로 3월초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정부 보유 불에 의한 외화대부를 실시했다. 이때의 달러 방출 액은 2천만 불이었으며 식량을 비롯한 생필품과 생산재수입에 각각 1천만 불을 할당했다. 또한 3월초 유엔군은 우리 정부에서 그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빌려간 8천5백80만불 상당의 원화를 전액 달러로 상환했다.
이 같은 사후 조치 결과로 그해 3월의 전국 도매 물가는 2월에 비해 39%가 떨어졌고 4월과 5월에도 계속 4·2%, 0·4%가 떨어졌다. 이러한 물가 안정 및 하락 효과는 53년11월까지 지속됐다. 하여간 통화 개혁을 한번 하려면 엄청난 국가적인 에너지가 소모된다. 회수된 구권을 처리하는 것도 만만찮은 문제였다. 구권을 실이 나르는데 수천대의 트럭이 동원됐다. 신폐를 보관했던 조방 창고에 갖다 쌓아놓은 구권은 정말 산더미 같았다. 이 돈들은 그후 펄프가 귀한 제지 회사들로 옮겨져 종이 원료로 용해됐고 일부 남은 것은 김정옥 발권국장의 지휘 아래 1주일에 걸쳐 소각되었다.
반년 이상 남 모르는 고생을 해가며 만들어낸 통화 조치 계획이 국회에서 하루아침에 뒤집혀지는 것을 볼 때 허무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동시에 경제에 우선하는 정치의 힘을 실감했다.
부분적인 고찰이긴 하지만 화폐의 호칭절하(디노미네이션)는 자칫 잘못하면 물가 상승을 촉발시킨다. 호칭 단위가 1백 분의1로 절하됐다고 물가가 거기에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구화 6백50원 짜리가 신화로 6원50전이되는 것이 아니라 7원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일본이 전후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이룩하고도 지금까지 화폐 개혁을 하지 않은 것은 이런 점을 간과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62년6월10일 군정 하에서 단행된 제2차 긴급통화 조치(10원을 1원으로 호칭절하 한 것) 때에도 이에 깊이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최고회의 의장 고문으로서 눈여겨봤다.
나는 성공의 가능성이 희박한 그 당시의 여건을 감안, 처음부터 반대했다. 국민 재산의 일부를 신설할 산업 개발 공사의 자본금으로 영구 동결하려던 2차 통화 조치의 계획은 실시 한 달만에 백지화되고 53년 2·15 조치보다 더 허무하게 끝장 나버렸다.
지금으로부터 18년전과 9년전에 있었던 1, 2차 통화 개혁을 회고해 보면서 나는 『가능한 한 통화 개혁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로써 이 이야기를 매듭 짓는다. 이것은 나의 소신이다. <끝> 【김유택】
※다음은 고복수씨의 가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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