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 만성신부전증 환자 건강 위협하는 병·의원 불법 마케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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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서울 마포구의 한 의원에서 70대 만성신부전증 환자가 혈액투석을 받고 있다. 해당 의원은 공짜 투석을 하지 않지만 ‘가끔 문의하는 환자가 있다’고 밝혔다. [강정현 기자]

환자에게 돈을 주고 밥까지 챙겨주면서 ‘공짜 투석’을 해주는 병원들이 있다. 어려운 환자를 위한 배려라기보다 많은 환자를 끌기 위한 마케팅 수단이다. 환자에게 돈을 받지 않아도 진료비의 90%를 건강보험에서 받는 구조라서다. 공짜 투석은 엄연한 불법이다. 하지만 투석 환자가 늘고 병원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사라질 기미가 안 보인다. 공짜 투석의 현장을 들여다봤다.

만성신부전증 환자 신모(46·서울 양천구)씨는 지난해 11월부터 혈액투석을 받기 시작했다. 투석이란 신장이 만성적으로 나빠진 환자(만성신부전증)의 혈액을 몸 바깥의 투석기로 빼내 노폐물을 걸러주는 의료 행위로 전문성이 필요하다. 만성신부전증은 한 번에 4시간씩 주 3회 혈액투석을 받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신씨는 당뇨를 15년 넘게 앓아온 터라 오른쪽 눈의 시력이 약하고 혈압이 정상치를 크게 웃도는 등 합병증이 심했다.

상당수가 전문의 없어 … 부작용 호소도

 처음에는 투석전문의가 운영하는 U의원에서 투석을 하다 올 5월 진료비가 공짜라는 말을 듣고 M병원으로 옮겼다. 직업 없이 혼자 사는 신씨는 공짜의 유혹을 떨칠 수 없었다. 회당 1만5000원(전체 진료비의 10%)을 환자가 내야 하는데 한 달에 12번 투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적지 않은 부담이 됐다.

 신씨는 M병원으로 옮긴 뒤 오른쪽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수술을 받았지만 시력을 살릴 수 없었다. 신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M병원에는 투석전문의가 없고 내과 의사가 있었다”며 “간호사 2명이 맞교대하면서 투석실을 지켰는데 한 명은 나보다 잘 모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신씨를 처음에 진료한 U의원 원장은 “신씨의 혈압이 올라가면서 눈의 혈관이 터져(출혈) 눈이 충혈됐다”며 “고혈압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실명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투석전문의가 있었다면 그 정도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도 했다. 투석전문의는 내과 또는 소아과 전문의 자격을 딴 뒤 다시 1년간 신장학회가 지정한 투석 병원에서 수련을 받아야 취득할 수 있다.

 만성신부전증 환자 김모(45·여·인천광역시)씨 역시 투석비용이 부담스러워 공짜로 혈액투석을 해준다는 인천의 A의원을 찾았다. 하지만 세 차례 공짜 투석을 받고 원래 병원으로 되돌아왔다. 김씨는 “투석전문의가 없었고 의료진이 기계만 조작하고 몸 상태가 어떤지 묻지도 않았다”며 “공짜 투석을 받는 동안 배에 물이 차고 숨이 가빠지는 등 몸이 안 좋아졌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오후 취재진이 직접 인천 A의원을 찾았다.

 “저희는 투석을 무료로 해드려요.”

 30대 남성 직원은 환자 보호자로 가장한 기자에게 “차량을 운행하고, 아침·점심을 제공한다”며 “집이 멀면 5분 거리에 숙소도 제공한다”고 자랑했다. 기자가 관심을 보이자 “한 달에 20만~30만원 정도 지원금을 지급한다”고 덧붙였다. “투석전문의가 있느냐”고 묻자 “투석전문의는 아니지만 경험이 많은 의사와 간호사가 있다”고 말했다. 현행 의료법상(27조) 환자를 유치하기 위해 진료비를 받지 않거나 상품권·생활비 등을 제공하는 것은 불법이다. 하지만 일부 신장투석 병·의원은 공짜라는 것을 미끼로 환자를 끌어들이는 불법 행위를 하고 있었다.

돌발 상황 대처 미흡 … 1회용 기구 재활용

 환자를 데려오면 소개비나 생활비를 주는 병원도 있다. 종교법인이 운영하는 경기도의 한 의원은 2010년 6월부터 2011년 11월까지 환자 5명에게 79회에 걸쳐 1700만원을 지급했다. 한 번에 20만원꼴이다. 1심 법원은 환자유인(의료법 위반)으로 판단해 법인에 벌금 700만원을 선고했다. 지난 7월 항소심에서도 1심은 그대로 유지됐다. 이 병원 환자였던 박모(60)씨는 “이 의원에서 월 생활비조로 50만원을 받았다. 병원이 다른 환자를 많이 데리고 오면 해외여행을 시켜주겠다고 공공연히 권유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인천 A의원 관할 보건소 관계자는 “의료기관 담당 직원이 1명뿐이어서 현장 지도나 단속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지난해 말 현재 투석 의료기관은 691곳으로, 2008년 562곳보다 23% 증가했다. 당뇨·고혈압 등의 만성병 증가로 만성신부전증 환자가 늘면서 병·의원들이 투석 분야에 속속 진출하고 있다. 손승환 대한신장학회 부회장은 “전국 수십 곳에서 공짜 투석이 이뤄지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병·의원들이 공짜 투석을 해주는 이유는 건보 수입 때문이다. 투석비용(15만원, 동네 의원 기준)의 10%(1만5000원)는 환자가, 나머지 90%(13만5000원)는 건강보험이 부담한다. 병원 입장에선 환자에게 돈을 받지 않아도 건보에서 월 162만원(13만5000원X12회)을 받을 수 있다. 한두 명이면 손해일 수 있지만 환자 수를 늘리면 어느 정도 수지 맞는 장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의사 한 명이 하루 129회 투석하기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은 지난해 4~6월 전국 688곳 투석 병원의 인력·장비·진료과정·진료결과 등을 평가했다. 그 결과 환경이 열악한 4, 5등급으로 분류된 병원 84곳 중 18곳의 의사 1인당 투석 횟수가 신장학회의 권고치(하루 36회)를 넘었다. 의사 한 명이 129회까지 투석하는 곳도 있었다. 혈액투석을 공짜로 하는 곳은 그만큼 수입이 줄어드니 의료의 질이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신장학회 이중건(남서울 내과의원 원장) 투석이사는 “환자에게 돈을 주는 만큼 투석에 쓸 돈이 줄어든다”며 “1회용 투석막을 재사용하거나 투석전문의가 없는 곳도 많다”고 말했다. 심평원 조사 결과 투석전문의가 없는 곳도 146곳이나 됐다. 심평원 변의형 평가관리부장은 “환자의 원인 질환·식습관·합병증 여부 등에 따라 투석하는 도중에 응급상황이 발생하거나 신체에 급격한 변화가 생기기 때문에 혈액투석은 현장경험과 전문지식이 풍부한 투석전문의에게 받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글=장주영·이서준·오경아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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