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 국민방위군 사건 (10) 선고와 형 집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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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사형"에 피고들 일순 창백>
1951년7월19일 고등 군법 회의는 국민 방위군 사건의 관계 피고들에게 형을 선고했다. 심언봉 재판장은 김태청 검찰관이 구형한대로 5명의 피고에는 사형을, 그리고 5년 구형을 받은 송필수에게는 무죄를 각각 선고했다. 이로써 온 국민의 시선이 총 집중한 가운데 15일 동안 계속된 재번 군재는 막을 내렸다. 공판 중 늘 찌는 듯한 무더위가 계속되었는데 선고 날에는 비가 내렸다고 한 취재기자는 회고하고 있다.
▲이목우씨 (당시 영남 일보 사회 부장·현 한국일보 부국장 겸 지방부장·52) <선고 공판은 19일 하오 1시부터 열렸는데 이날은 아침부터 보슬비가 내렸어요. 그래도 방청인들은 쇄도하여 입추의 여지가 없었지요. 동인 국민학교 정문에서 약 20m쯤 들어가 피고들이 수감돼 있는 천막이 있고 그 바로 남쪽에 강당이 법정이었어요. 나는 그때의 「메모」첩이 아직 있어 시간 등 선고 「스케치」는 정확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1백여명 되는 법정에는 오른편에 검찰관석과 변호인석, 그리고 정면 단위에 심판관석이 마련돼 있었어요. 심판관석 뒤에 무장 헌병이 4명, 단에서 내려오는 양편 통로에 각각 2명씩, 입구와 실내외에도 많은 배치돼 분위기는 한마디로 다른 공판 때 보다 더 삼엄했습니다. 1시5분전에 검찰관 김태청 중령을 선두로 김동섭 소령, 서병균 검사가 들어오고 이어 9명의 변호인들이 입정하면서 장내의 긴장은 고조됐어요. 1시 정각에 이기붕 국방과 최경록 헌병 사령관이 특별 방청석에 들어와 앉고 곧 김석원 장군도 나타납디다.
1시7분에 김윤근 피고를 선두로 윤익헌·강석한·박창원·박기환·송필주의 순서로 피고들이 헌병들의 호위를 받고 들어왔어요. 피고들은 군복을 입고 있으나 수염은 길고 얼굴은 수척합디다. 1시8분에 김태청 검찰관이 피고들의 소속과 성명을 묻자 모두 들리락말락한 소리로 대답하는데 박기환 피고만은 힘있는 목소리였어요.
이윽고 1시14분에 심언봉 재판장이 김윤근 피고를 비롯한 5명에게는 검찰관 구형대로 사형을, 송필수 피고에는 무죄를 선고하자 사형 받은 피고들의 얼굴은 창백해집디다. 이내 재판장을 비롯한 심판관들이 퇴장하고 피고들은 헌병들이 밖에 대기한 「지프」로 데리고 갑디다. 이렇게 선고 공판은 아주 간단히 끝났어요. 나는 즉시 자전거를 타고 신문사로 달려 호외를 냈지요.>
이번에는 한 심판관의 이야기.

<부사령관 발뺌에 모두 분연>
▲김형일씨 (당시 방위군 사건 군재 심판관·군수국장=준장·현 국회의원·신민당 사무 총장·48) <4명의 심판관은 드러난 모든 증거나 상황으로 보아 사령관 김윤근 피고는 횡령내용을 잘 몰랐던 것 같고 부사령관 윤익헌 피고가 모든 처리를 한 것으로 심증을 굳히고 있었는데 오히려 윤이 발뺌하자 정상을 참작할 점이 없다는데 의견을 모았어요. 심판관들은 선고 공판이 열리기 하루 전에 대구 시내 어느 여관에서 합숙하면서 형을 확정짓기 위한 의견을 나누었읍니다.
김윤근 사령관의 형량을 두고 심판관들 사이에 이견이 있어 논란을 벌이기도 했어요, 그 당시 군법 회의는 심판관 전원일치라야만 형을 확정 지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이날 밤에 심판관들은 많은 논란을 벌인 끝에 비밀 투표로 5명의 피고들에게 사형을 내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선고 날 심언봉 (고) 재판장이 5명의 피고에게 사형을 언도하자 얼굴이 백지장처럼 된 김윤근 피고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부사령관 윤익헌 피고도 얼굴빛이 변하더군요. 재판장 이하 심판관들도 침통한 표정으로 곧 퇴정했읍니다.>
한편 군재에서의 사형 선고로 국민의 분노는 어느 정도 가시는 듯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형을 선고했지만 집행은 하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는 해외로 빼돌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처럼 이때의 사회 풍조는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충만 돼 있었다.
이래서 총살 집행도 군재처럼 일반에 공개하게 된 것이다. 사형수에게도 형 집행 전까지는 인권이 있고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보면 일종의 「조리 들리」는 식의. 이런 재판과 형 집행은 확실히 이례적이었다는 비평을 받을 만도 했다. 요는 이 사건에 세론과 정치력이 얼마만큼 거센 영향을 끼쳤는가를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다음은 형 장「스케치」.

<마지막 순간에도 "잘 봐달라">
▲태륜기씨 (당시 육본 법무 감실 심사 과장=중령·예비역 대령·현 변호사·53) <선고가 끝난 후 문제의 윤익헌 부사령관이 나를 꼭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해서 면회를 했더니 『잘 봐달라』는 한마디뿐 이예요. 내 힘으로 될 일이 아니지요. 8월13일 5명의 사형수들이 대구서 약 10km 떨어진 화원 산록에 도착한 것은 1시35분이었어요.
우거진 잡초 속에 흰 말뚝이 5개 서 있고 사형수들은 화석 같이 묶여 있읍디다.
그걸 바라다보니 왠지 동정이 갑디다. 헌병들이 사형수들의 얼굴에서 흐르는 비지 같은 땀을 수건으로 연방 닦아주더군요. 정말 처참한 해골을 보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내 가슴을 아프게 찌르데요. 사령관·부사령관 순으로 5명을 말뚝에 꼼짝 못하도록 묶어놓고 헌병들이 사격 선에 정렬을 합디다. 군목의 설교가 끝나자 검은 헝겊으로 눈을 가리고 심장 위에 표적을 달데요. 형장에서는 한사람도 유언을 남기지 않았어요.
집행 장교가 시계를 들여다보는데 가장 짧고도 긴 것처럼 느껴졌어요. 정각 하오 2시 사격 명령이 내리자 총성은 무더운 공기를 진동시키고 사형수들의 가냘픈 신음소리가 정막을 흔듭디다. 2∼3분 뒤에 집행 장교와 군의관의 시체 확인이 끝나고 「트럭」위에 상주 없는 사형수들의 관이 실렸어요.>
▲박인환씨 (당시 경향신문 기자로서 총살 현장을 취재 보도한 기사의 일부·고) <사형수들에게는 이날 아침 8시에 사형 선고 후 처음으로 가족과의 면회가 허용되었다. 이들은 하오 1시에 군 「앰뷸런스」에 실려 집행장인 화원 산비탈에 도착했다.
헌병의 경비를 받으며 언덕길을 걸어 오르는 동안 이들은 서너 개비의 담배를 계속 피우고 이마엔 땀이 비오듯했다. 집행 장에서 2∼3백m 떨어진 언덕 위에는 4백 내지 5백명의 군관민과 15명의 기자들이 집행 광경을 지켜보았다. 정각 2시에 집행관 송효순 중령이 인솔한 101 헌병 대대의 병사들이 쏘는 20여 발의 총소리가 계곡을 진동했다. 모든 것은 끝나고 골짜기는 다시 조용해졌다.>
▲송효순씨 (당시 101헌병 대장=중령·예비역 준장·현 재향 군인회 사 무총장·47) <총살하는 날 아침에 피고들에게 최후의 소원을 물었더니 가족을 한번 만나게 해 달라는 거예요. 원래는 안되지만 법무 감실에 특별 면회를 허가해 달라고 요청해서 허락을 얻었지요. 그래서 김윤근 사령관은 총살 현장으로 가는 「앰뷸런스」가 문 앞에 대기한 채 형무소 마당 한구석에서 가족과 만났어요. 김 등 모든 피고들은 자기들이 지은 죄를 깊이 뉘우치고 형장에서도 조용히 눈을 감았읍디다.>
이렇게 해서 발단 8개월만에 막을 내린 국민 방위군 사건은 우리에게 여러 뼈저린 교훈을 남겼다. 첫째로 국민들은 직접 눈으로 형 집행을 확인하고서야 정부를 어느 정도 믿게 됐고, 사회 정의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국민이 한번 정부를 등지게 되면 둘이 다시 손잡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이 사건은 생생히 보여주었다. 둘째는 처음에는 선의와 절대 필요에서 계획한 방위군을 관계 당국자들이 입안과 시행 과정에서 너무나도 주먹구구식으로 안이하게 낙관적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방위군 운영에 허점 많아>
50만 장정을 등원·조직·후송·훈련하려면 치밀한 계획과 준비를 갖추었어야 했다. 세째는 방위군 지휘부 구성에 있어 군의 상식이나 법규나 전통을 전혀 무시했다는 것이다.
방위군 간부들도 처음부터 「악의 인물」은 아니었는데 분수에 훨씬 넘는 큰 벼락감투를 쓰고 견물생심의 속담 그대로 돈더미 속에 앉게 됨으로써 점차 나락으로 빠지게된 것이다. 「누구나 다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고금동서를 통한 진리임을 이 사건은 다시 한번 깨우쳐 주었다고 하겠다. 이 처참한 사건을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될 것이다.
◇주요일지 (1951년3월15, 16, 17일)
※3월15일 ▲서울 주변의 잔적 소탕 완료 ▲사회·보건부, 일부 서울 향발 ▲비율빈의 공산 「후크」단원 1천1백명 귀순.
※3월16일 ▲「맥」원사, 서울 환도 보유하라고 이 대통령에게 서한 ▲신 국방, 서울 방문▲국부, 중공군 하계 공세 위해 40만 증파 언명.
※3월17일 ▲「유엔」군, 서울 북방 1km 진출 ▲「맥」원사, 13차로 한국전선 시찰 ▲김일성, 최후까지 싸운다고 「스탈린」에 서한 ▲「이란」왕, 자기 소유지 일부를 농민에 분배 ▲영, 원자탄 생산 개시 발표.
※알림=「민족의 증언」문의나 연락 전화는 (28)8211 (교환)의 74번, 야간과 일요일은 (94)3415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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