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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 정치권의 시즌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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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정하
정치국제부문 차장

Q: 3·1운동이 1919년에 일어난 이유는?

A: 충청도 사람들이 나라 뺏긴 걸 그때서야 알게 돼서.

 14년 전 자민련에 출입할 당시 당직자들이 자주 하던 우스갯소리다. 충청인이 느리다고 하지만 일단 결심하면 대단한 일을 벌인다는 의미였다. 그러면서 윤봉길·한용운·김좌진·이동녕·신채호·유관순·박헌영 등 한국 근현대사에서 항거와 비타협으로 족적을 남긴 충청 출신 인사들을 줄줄이 열거하곤 했다. 듣고 보면 그럴듯했다.

 따지고 보면 자민련도 한 박자 늦게 욱하는 충청도 기질에 힘입어 생긴 당이었다. 1995년 1월 ‘김종필(JP) 신당설’이 나돌 무렵 김윤환 당시 정무장관은 한 기자가 “충청당이 생기면 보수적 정서로 볼 때 대구·경북과도 통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묻자 “대구·경북이 핫바지가”라고 받아넘겼다. 그런데 이 말이 엉뚱하게 대전의 한 지역 언론에 ‘김 장관 충청도 핫바지 발언 물의’라는 식으로 보도가 됐다. JP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충청권 가는 곳마다 “우리가 핫바지유?”라고 떠들었고, 분기탱천한 충청도민들은 그해 지방선거와 96년 총선에서 자민련에 몰표를 던졌다.

 하지만 그 이후 JP의 행적은 전혀 ‘충청스럽지’ 않았다. 97년 대선 때 JP는 이회창과 김대중(DJ) 사이에서 숨막히는 줄타기를 하더니 내각제를 고리로 막판에 DJ와 손을 잡았다. 집권 후 DJ가 거추장스러운 내각제 공약을 깨버렸지만 권력에 취해 있던 JP는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민심이 악화되자 JP는 2000년 총선 직전 DJP 공조 파기를 선언했고, 자민련이 비교섭단체로 몰락한 뒤엔 DJ 측으로부터 의원을 꿔오는 조건으로 공조를 복원했다. 그러다 2001년 통일부 장관 해임 표결 때는 한나라당 편에 가담해 다시 공조를 파기하는 등 왔다갔다 행보를 이어갔다. JP가 2004년 총선에서 10선 달성에 실패하며 정계 은퇴로 내몰린 것은 ‘양다리 정치’에 대한 충청 민심의 냉엄한 심판이었다. 충청권의 맹주라는 JP조차도 충청 민심을 가볍게 보다가 응징을 당한 셈이다.

 요즘 충청 정치권의 목소리가 다시 커지고 있다. 올해를 기점으로 충청 인구가 호남을 추월하면서 부쩍 커진 자신감이 배경이다. 영호남 시대가 아니라 영충호 시대라는 말도 생겼다. 영남 의원들이 다수인 새누리당에서 ‘충청 대표론’이 제기되고, 호남이 텃밭인 민주당에서도 인구 비례에 맞게 의석 수를 재조정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그동안 영호남 사이에서 눈칫밥 먹던 설움을 떨쳐버리고 정당한 내 몫을 되찾겠다는 해방선언처럼 들린다. 정치인이 자기 지역의 이익을 챙기는 거야 당연한 일이다. 다만 충청 정치의 시즌2는 자민련 시절과 달라야 한다. 영호남은 상수고, 충청이 변수라는 전통적 ‘캐스팅보트론’은 이제 덩치가 커진 충청에 맞지 않는 옷이다. 오히려 충청이 앞장서 영호남 양극 구도를 해체하고, 궁극적으로 지역 패권 정치의 종식을 이끄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충청엔 그럴 능력이 있다.

김정하 정치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