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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제21화>소련공동위원회(4)|문제안<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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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군정청 1차 회담>
공위에 참가한 소련군대표단이 서울에 온 것은 개회하루전인 15일 낮12시45분이었다. 그때까지는 38선의 말뚝이 굳어지지 않아서 소련대표들은 열차 편으로 서울역에 도착했다.
대표단은 「스티코프」중장을 단장으로 73명으로 구성돼 있었지만 잡용부까지 합쳐서 1백명이 훨씬 넘었다.
소련대표가 탄 북녘 열차가 서울역에 도착하자 미군 측에서 차편을 제공하여 「스티코프」수석대표와 수석수행원 「하밀」소장, 「에먼예프」소장, 전권공사 「차라프킨」, 고문관 「젤라시노프」등 주요인사는 조선「호텔」에 들었고 이 밖의 실무자급은 소련 영사관 숙소에 들었다.
소련대표단이 도착하기 전에 「하지」장군을 미군측 대표는 「아널드」장군이라고 발표하고 하오4시30분에 바로 내일이면 미소공위가 열리게 될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언론계 대표(사장들)를 초청해서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하지」장군은 이번 회담은 예비회담으로 38선의 철폐문제, 교통·통신의 문제 등 실무를 다루게 될 것이며 정치적인 문제는 제2차 회의에서 다루고 조선대표들은 그때에 참석하게 될 것이라고 회담의 성격을 비쳤다.
그리고 이 공위는 비밀회담이 되며 회담결과 필요한 것은 「코뮤니케」를 통해 알려 주겠다고 못박아 버렸다.
그때까지 5, 6개월 동안 미군의 복장은 눈에 익었지만 처음 보는 소련군의 복장은 흉측했다, 울긋불긋하고 큼직한 견장이며 「맥시」에 가까운 「오버코트」며 구두등이 모두 날씬한 복장의 미군과 비교하여 촌티가 흐르는 것들이었다.
첫 위원회는 16일 하오1시에 열리기로 되었던 것이지만 사실은 15분 늦게 열렸다.
회의장소인 군정청 제1회의실은 역사 깊은 곳이었다.
8·15전까지는 일본총독의 귀빈접대실이었고 45년9월9일에는 일본의 조선군사령관이 항복문서에 조인한 방이었다.
이보다 늦은 10월17일에는 환국한 이승만 박사가 처음으로 기자회견을 갖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경구를 남긴 것이 바로 이 회의실이었다.
첫 개회식에는 미군 측에서 「하지」장군과 「아널드」소장, 「티쉬」소장, 「베닝호프」 「푸스」, 「프리트」 「언더우드」(고원한경), 「헐리히」, 「코넬슨」씨 등 9명이 참석하고 소련군 측에서는 수석대표 「스티코프」와 전권공사 「차라프킨」 「로마넹코」 「샤낭」 「엘라사노프」, 「부르소프」, 「마츠로바」등 7명만이 참가했다.
회의개최가 15분 늦은 것은 「하지」장군과 「스티코프」가 늦었기 때문이었다. 회의장은 단조로 왔다. 왼쪽에 미군대표가 자리잡고 오른쪽에 소련군이 앉아 이를테면 좌우가 바뀐 것이었다.
태극기를 가운데 두고 깃발도 왼쪽이 미국기 오른쪽이 소련기였다.
첫 회담의 개회는 공개되었다. 그때의 각 신문 중앙청 출입기자들이 전부 들어갔는데 1시15분에 회의실에 들어선 「하지」와 「스티코프」는 역사적인 악수를 나누고 제자리에 앉았다.
대체로 미군대표는 날씬하고 지성적인데 비해 소련군 대표는 뚱뚱한 몸집에 음흉한 인상을 주었는데 이중에서 전권 공사인 「차라프킨」이란 자는 아주 똑똑해 보였다.
이 「차라프킨」은 이때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지금은 미·소의 핵 회담의 대표로 나오는 바로 그 사람이다.
개회인사는 「하지」장군이 먼저 했다.
그의 연설요지는 대체로 『37년간 일본의 학정아래 시달린 조선인이 받은 정치적 경제적 고통은 이번 공위의 결과로 말끔히 끝막음을 내려야한다』는 것이었다.
「스티코프」의 기조연설도 또한 같은 뜻으로 『이 회담은 조선으로 하여금 원활한 경제생활을 도모하기 위하여 행정적 경제적 부문에서 성공되어야한다』고 했다.
서로의 인사는 각각 영어·소련어·한국어로 번역되었다.
「하지」장군의 영어로 된 연설은 미군장교 「코넬」이 노어로 번역하고 이묘숙씨가 우리말로 통역했다
이묘숙씨는 미·소 공위를 위해 특별히 초청되어 회담의 통역을 맡은 것이었다.
「스티코프」의 연설은 미국인 「코건」여사가 영어로 통역했고 최「드미트리」라는 소련인 2세가 다시 한국어로 번역했다.
최「드미트리」는 그때 33살의 젊은 사람이었는데 고향은 함북이지만 소련 태생이라는 것이었다.
한번 단독으로 만나려고 했지만 최「드미트리」는 『수뇌부의 명령이 없으니 다음 기회 있으면 만나자』고 하고는 꼬리를 뺐다.
그때 그는 감시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양측대표의 연설이 끝나자 기자들은 모두 퇴장명령을 받아 쫓겨나고 회의실 정문에는 MP가 경비를 섰다. 꿍꿍이속 이른바 제1차 미·소 공위 비밀회담이 이때부터 진행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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