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도자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현재의 중공수뇌부는 소위「정강산 투쟁」(28∼34년) 이래의 동료이거나 아무리 늦어도 연안시절 (25∼45년) 때부터는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사람들이다. 주덕·주은래·임표 등은 정강 산에서 합류했던 부류이고 그밖에 진의·진백달·황영승, 숙청당한 유소기 등은 연안시차에 가세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의 반세기에 걸친 유대관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사고방식과 이론해석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50년대 초에 있었던 팽덕회 등 소위 「유무기파」에 대한 숙청, 지난번의 문화대혁명 등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결국 현재의 「집권충」은 문혁 과정을 여과하면서 사상적 획일성을 갖게된 정예분자라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평면적 삼단논법이 과연 옳은 것일까….
이 질문은 현재의 중공지도자들이 『어떤 기준』에 의해서 분류될 수 있는가와 통한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현 지도자들의 사상적 획일성은 부정된다. 문혁을 주도했던 「문혁 소조」「그룹」과 유소기의 파괴된 조직을 흡수한 주은래 파는 명확히 구별되기 때문이다.
문혁 소조「그룹」은 강청·진백달·강생·이설봉·요문원 등으로 집약된다.
소조구성원들의 「파워」가 극에 달했던 것은 67년께. 이들은 유소기의 실권파를 몰아내기 위해 공산당의 전 조직을 파괴, 그 대신 혁명위원회를 설치했다. 말하자면 모택동-임표-문혁 소조 혁명 위의 지배질서를 구축한 것이다.
그런데 문혁 소조의 이러한 전횡에 대해 첫「브레이크」를 건 것이 바로 주은내였다.
그는 소조 파가 국무원의 관리들을 「구관료」의 일단으로 간주, 조반운동을 일으키려 하자 설득과 직권으로 이를 봉쇄한 것이다. 문혁 소조들의 천하였던 당시로서는 이만저만한 모험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주는 이 작업에 성공했다.
주은래의 문혁 소조에 대한 견제는 그 뒤 더욱 강화되어 광동에서는 홍위병의 공세로 탈권 직전에 있던 황영승(현 총 참모장)을 구했고 그밖에 중앙관서와 지방행정조직의 구류소기파 인사를 모두 흡수했다.
특히 68년 이후에는 임표의 본가인 중공군내부에도 침투, 이작붕·구회작·오법헌·온옥성 등 유능한 장성들을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공작의 효과는 69년4월 구전대회를 치른 뒤부터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이선념·사부치·방의·교관화·이강 등 주를 정점으로 한 계보의 인사가 문혁 소조 파를 압도한 것이다.
더구나 중공군의 직접 통솔을 책임 맡은 총 참모장 황영승이 주 쪽으로 접근한(이점은「업저버」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현재로써는「주은래 유리」가 통설로 되고 있다.
문혁의 정당작업에도 불구하고 수뇌진 내부에 이처럼 금이 간 것은 문혁 자체의 모순 때문이었다. 말하자면「주자파」의 수정노선에도 따와야 할 「장점」이 있었다는 얘기이다. 주의 국무원 구관료 옹호는 바로 이 장점을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그의 인기도 이러한 성품이 가져다 준 선물이었다.
69년 구전대회 때 모는 자신의 후계자로 사실상 임표를 지명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후계자의 조건으로 ①진정한「마르크스·레닌」주의자일 것 ②국민의 90%에게 봉사할 것(10%는 수정주의자를 가리킨다) ③겸허할 것 ④민주 집중 제를 행할 것 ⑤의견이 틀리는 사람과도 일할 수 있을 것 둥을 열거했다.
이것은 모가 후계자문제에 대해 밝힌 처음이자 마지막 논문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조건이『주은래를 위한 것』이라고 해석했었다. 임에게는 ②항과 ⑤항이 결정적으로 불리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하루 5시간밖에 안 자면서 20년 동안 7억 인구의 살림을 꾸려 온 사나이와 창백한 폐결핵환자는 문혁이 아니었던들 비교해 볼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공 수뇌진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금은 폭발을 피할 수 없을 정도의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최근에 야기된 『북평의 「미스터리」』를 문혁 소조 파와 주은래 파의 노선투쟁의 징조로 받아들이지만 설사 이것이 사실이라 해도 타협의 가능성은 남아있다고 판단된다. 바꾸어 말하면 현재의 「장기 침묵」이 타협을 모색하는 「유예기간」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뇌급에서의 낙관적 전망과는 달리 권력의 하부구조는 매우 위험한 측면을 보이고 있다. 문혁의 부산물로 군부가 대량 진출한 점이 그것이다.
예컨대 구전대회에서 선출된 2백79명의 중앙위원 중 거의 40%에 가까운 1백11명이 군 출신이었고 지난 8월 완료된 지방공산당위원회에서도 위원의58%, 29개성 당 위원장 중 22개성이 군 출신이었다.
이러한 현장이「브레즈네프」의 말대로 「군사관료독재화」를 의미하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분명히 우려해야 할 사태라 하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