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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본 뜬다고 암각화 주변에 말뚝 … 그림 부위 상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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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호 07면

마구잡이 탁본 1990년대 초반, 반구대 암각화 탁본 붐이 일었을 때 대학 연구팀이 마구잡이 식으로 탁본을 떴다. 탁본은 소수의 작업자가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떠야 한다. 그러나 사진에서처럼 비계를 설치하거나 심지어는 돼지기름을 발라 모형을 뜨기도 했다. 암각화를 훼손한 행위였다.
1 백화 현상 이암 성분이 포함된 바위는 물에 잠기면 칼슘이 녹아나와 마르면서 백화현상이 일어난다. 이로 인해 바위에 새겨진 그림이 지워진다. 2 중앙말뚝 암각화 정중앙의 쇠말뚝. 탁본을 뜨기 위해 이 말뚝에 로프를 걸어 배를 고정시켰다. 이 때문에 바위가 부서지는 일이 발생했다. 3 먹물 침윤 마구잡이 탁본으로 암각화 여러 곳에 먹물이 스며들었다. [사진 한국전통문화학교 김호석 교수의 『그림으로 쓴 역사책 반구대 암각화』

“문화재는 연구자들에 의해 일차적으로 훼손된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 잔혹사

 억설 같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문화유산 취재현장에서 그 사례들을 확인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본지 10월 27, 28일자 스페셜 리포트)에도 숱한 비화(秘話)가 넘쳐났다. 현장에는 암각화 모형을 뜨려고 발랐던 FRP(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 흔적이 아직까지도 지저분하게 엉겨붙어 있었다. 쇠말뚝 자국과 바위의 부서짐, 그리고 탁본 먹물도 그림 곳곳에 침윤돼 있었다. 참담하면서도 부끄러운 이면이 아닐 수 없다.

 1965년 사연댐 담수가 시작되고 무려 48년간 암각화를 ‘물고문’시킨 것도 모자라 대학의 연구자들까지 훼손을 부추긴 셈이다. 이름 밝히기를 꺼리는 연구자들의 증언과 사진, 현장 확인을 근거로 반구대 암각화 수난사를 소개한다.

 71년 12월 25일 성탄절. 문명대(72·당시 30세) 교수가 반구대 암각화 존재를 학계에 보고한다. 이후 그는 10년간 많은 탁본을 떴다. 뒤이어 역사학자, 고고학자, 서예가들의 탁본 행렬이 줄기차게 이어진다. 심지어는 대기조까지 있었다.

 “겨울에는 탁본을 하지 않는 게 상식입니다. 얼어서 잘 되지도 않고 그림을 손상시킬 가능성도 있지요. 그런데 얼음 위에 서서 물 묻힌 종이를 불로 녹여가며 무리하게 탁본을 해댔습니다. 날이 풀리자 암각화 바로 밑에까지 차오른 물을 건너느라 배를 타고 들어가서 탁본을 합니다. 배를 고정시키기 위해 암각화 바로 옆, 바위틈새에 쇠 말뚝을 박고 끈을 묶었습니다. 말뚝 박았던 자리가 크게 떨어져나가 버렸고 배가 흔들리면서 친 그림 부위가 상했지요. 옷가지 같은 것으로 대서 충격을 막아주는 최소한의 조치도 하지 않았던 거죠.” 한 전문가는 개탄했다.

 본지는 충격적인 사진자료와 당시 탁본 작업에 참여했던 연구자의 증언도 확보했다. 문화재청(당시는 문화재관리국)의 허가를 받고 그 관리 감독 아래 조심스럽게 진행해야 하는데, 허가도 받지 않고 떼로 몰려들어가 마구잡이 탁본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암각화 탁본 러시였다. 수백 차례가 넘을 거라는 얘기다.

 미술사학계의 대부 격인 서울대 H교수와 학생들도 가세해 국보를 공공연한 실습장으로 썼다. 탁본 경험이 없는 학생들을 투입해 심각한 먹물 침윤과 그로 인한 화학반응으로 그림이 훼손되게 했다. Y대팀은 나무로 가설물을 설치하고 20여 명이나 벌떼처럼 달라붙어 탁본을 떴다. 암각화 보호보다 탁본 그 자체만을 목표로 강행했다.

 더 큰 문제는 탁본, FRP 뜨기, 물고문 같은 행위들이 6000년 전 암각화 제작자들의 손톱, 지문, 머리칼 등 숨어 있는 유전적 정보를 모두 지워버린다는 점이다.

 2003년도엔 S대 연구소에서 2.1㎏ 짜리 슈미트 해머(반동 경도 측정기)로 189개의 측정 포인트를 수백 번 때렸다. 미세 균열의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K교수는 암각화 세 부분을 떼어내 초음파 검사를 했다. 암각화에 치명적인 손상을 끼친 사례들이다.

 지방 국립 K대에서는 국보 지정 직전, 음식 모형 만드는 업자를 시켜 암각화에 돼지기름을 바르고 FRP로 모형을 떴다. FRP 찌꺼기들이 지금까지도 암각화 옆에 남아 있다.

 또 다른 국립 G대팀 역시 모형을 떴다. 탁본하기 위해 비계를 매다가 암각화 옆을 때렸다. 바위가 30cm나 떨어져나갔다.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황평우 소장이 고소했으나 검찰은 무혐의 처리했다.

 울산의 한 대학 팀에서는 반구대 앞에다 비계파이프를 설치했다가 넘어져 암각화를 훼손했다. 그들은 비계파이프를 고정시켰던 이음쇠들을 반구대 암각화 앞에 수북이 쌓아놓고 가버렸다. 어느 암각화 권위자는 인사동에서 탁본 전문가를 데려다가 바위 벽에 매달려서 탁본했다. 장대를 들고 건너는 사진도 있다. 소용돌이치는 물에 익사하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코미디다. 물이 차 있어서 사다리를 못 가져가고 암각화 벽에 기대 돌을 계단처럼 쌓아놓고 탁본하는 사진도 있다. 끔찍한 장면이다.

 연구자들은 왜 그렇게 탁본과 모형 뜨기에 병적이다 싶을 만큼 집착한 걸까. 그것으로 과연 연구는 제대로 한 걸까.

 “거의 모든 대학교 박물관에는 반구대 암각화 탁본이 걸려 있다. 처음에는 선사시대 우리 문화원형을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좋은 의도로 탁본을 떴을 거다. 그런데 나중에는 억대가 넘는 돈을 받고 거래되었다. 반구대 암각화가 투기 대상이 된 거다. 저녁에 몰래 가서 탁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수백, 수천 번 탁본했다고 봐야 한다.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댐을 막고 물을 채워서 물고문하고 물이 빠지면 탁본으로 고문한 거다. 참혹한 48년간의 암각화 수난사다. 암각화는 한번 부서지면 영원히 망가지는 거다. 선진 유럽에서 문화재 원형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신중한지를 배워야 한다.”

 한 암각화 전문가는 탁본 행위 자체가 암각화를 죽이는 거라서 자신은 절대 탁본을 뜨지 않는다고 했다.

 암각화를 해머로 때리고 먹칠을 하거나 돼지기름을 바르는 행위는 아무리 목적이 선하다 해도 모독이다. 신성성을 해치는 파렴치한 행위다. 학자라면 암각화를 고문해서는 안 된다. 문화재청에서도 처음부터 몇 점만을 허가했어야 했다. 나머지는 복사해서 공급했어야 옳았다.

 그 하늘, 그 산하, 그 공간이 있어 반구대 암각화는 가치가 있다. 암각화가 지닌 장소성과 신성성을 더럽히거나 망가뜨려 놓고 오직 고래나 호랑이, 춤추는 샤먼 그림만 똑 따서 무차별로 탁본해 박물관에 걸어두면 되는 걸까.

 6000년 전, 이 땅의 선조가 신성한 장소를 선정해 남겨준 우리 문화의 원형을 우리는 줄곧 훼손시켜 왔다. 물이 차면서 칼슘 성분이 녹아 백화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반구대 암각화. 물막이 설치를 염두에 두고 발굴조사를 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반구대 암각화의 수난사는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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