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대기표 9번 존 댈리 … 출전도 기적, 메이저 우승도 기적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47호 19면

LPGA 투어 하나외환 챔피언십 1라운드가 열린 지난달 18일 아침. 이미림이 여자프로골프협회에 손목이 아파 출전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그의 티타임은 오전 9시20분이었다. 대기 순번 1번 김혜윤은 대전에 있어 시간 내에 올 수 없었다. 다음 순번 최혜정, 그 다음 선수 김다나도 그랬다.

성호준의 세컨드샷 <1> 대타 출전이 바꾼 골프인생

 이민영이 8시30분 전화를 받았다. 순번이 4번이라 대회에 나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샤프트를 바꾸려고 클럽을 피팅센터에 맡겨놓은 터였다. 시간에 맞춰 대회장에 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가 사는 동수원에서 대회장인 영종도까지는 1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출근 시간이었다. 그래도 시도는 했다. 예전에 쓰던 아이언만 차에 싣고 러시아워를 뚫고 날아갔다. 골프장에 도착한 시간은 9시20분. 클럽하우스 앞에 아무렇게나 차를 대놓고 냅다 티잉 그라운드로 뛰었다.

 티타임에 3분 지각했으나 경기는 할 수 있었다. 드라이버도, 우드도, 웨지도, 야디지북도, 핀 포지션도, 장갑도, 캐디도 없었다. 가지고 있는 장비 중 가장 긴 5번 아이언으로 티샷을 했다. 그는 주위 갤러리에게 캐디를 해달라고 사정을 했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아르바이트 진행요원에게 캐디피를 주겠다고 하고 겨우 가방을 맡겼다. 첫 홀 보기를 했는데 지각에 대한 벌타 2타가 얹혀 트리플 보기로 기록됐다.

 2번 홀을 마칠 때쯤 모자라는 클럽이 채워졌다. KLPGA 직원이 갤러리 광장 장터에서 급히 사온 재고품 드라이버와 우드, 웨지였다. 남성용을 샀어야 하는데 여성용이었다. 샤프트가 너무 낭창거렸다. 드라이버는 그나마 살살 달래서 쳤지만, 우드는 손이 내려오기도 전에 헤드가 휘청 내려와 이른바 ‘쪼루’가 났다. 첫날 10오버파였다.

 2라운드에서 이민영은 이븐파를 쳤다. 자신의 클럽과 캐디, 야디지북 등으로 무장했다. 3라운드에서는 3타를 줄였다. 최종합계 7오버파 공동 58위다. 첫날 10오버파를 제외하고 2,3라운드만 치면 3언더파로 10위권이다. 경기 시작 50분 전에 통보를 받고 LPGA 투어에서 10위권이면 대타로 나와 적시타를 친 정도는 된다.

 이민영이 첫날부터 자신의 클럽으로 유능한 캐디와 함께 경기했다면 어땠을까. 마지막 날 3언더파를 친 것을 보면 3라운드 합계 9언더파(우승스코어), 혹은 그보다 잘 쳤을 개연성도 있다. 이민영은 신데렐라 유리 구두의 주인공이 됐을 수도 있다. 물론 대기 앞 번호를 가진 김혜윤, 최혜정, 김다나 모두 그렇다.

 야구에서 대타는 후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감독은 단기전 등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내보내기 위해 잘 치는 선수를 숨겨놓는다. 하나외환 챔피언십 3라운드가 열린 바로 그날 벌어진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LG-두산 4차전에서 두산 최준석은 대타로 나와 팀의 한국시리즈 진출을 사실상 확정하는 홈런을 쳤다. 그는 이후 4번 타자로 발탁됐다.

 골프에서 대타로 나와 만루홈런을 친 예도 있다. 존 댈리는 1991년 PGA 챔피언십에서 대기 선수 중 마지막 순번인 9번으로 기다리다 우승했다. 메이저 대회를 포기하는 선수는 거의 없는데 신기하게도 여러 선수가 기권을 했고 경기 전날 닉 프라이스가 아내의 출산 때문에 갑작스럽게 집에 돌아가면서 그에게까지 기회가 왔다. 댈리는 zero to hero(무명에서 영웅으로)의 전설이 됐다.

 그래서 더 아쉽다. 기회는 노크하고 오지 않는다. 카네기는 “좋은 기회를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것을 잡지 못했을 뿐”이라고 했다.



중앙SUNDAY는 이번 주부터 중앙일보 골프담당 성호준 기자와 (사)한국골프장경영협회 법률고문 소동기 변호사의 칼럼을 교대로 연재한다. 성 기자는 『맨발의 투혼에서 그래드 슬램까지』 등을, 소 변호사는 『퍼스트 라운드』를 저술한 국내 대표적인 골프 칼럼니스트다. 성 기자는 ‘성호준의 세컨드샷’이라는 제목으로 투어와 선수들에 관한 뒷얘기를, 소 변호사는 26년 구력을 바탕으로 골프와 인생에 대한 성찰이 담긴 ‘소동기의 이야기 골프’를 풀어낼 계획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