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기의 글로벌 포커스] 노키아 없는 핀란드 vs 삼성 없는 한국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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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강일구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노키아가 무너진 뒤의 핀란드가 궁금했던 건 남의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나가던 시절 노키아는 핀란드 국내총생산(GDP)의 25%, 수출의 20%, 연구개발 투자의 30%, 법인세의 23%를 차지하며 핀란드 경제를 끌고 가는 보배 같은 존재였다. 그랬던 노키아가 한순간에 침몰했다. 그 후 줄잡아 5년이 흐른 지금, 핀란드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때마침 궁금증을 풀어주는 보도가 잇따라 나왔다. 파이낸셜타임스(FT)와 이코노미스트 등 유럽 현지 언론은 대체로 희망적인 소식을 전한다. 이 나라 경제에 새살이 돋아나고 있다는 내용이다. 자연의 신비로운 복원 능력이 산업 생태계에도 통하는 것일까. 미국 옐로스톤 같은 산림에 대형 산불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지만 몇 년 안에 생태계가 재생되듯이 말이다.

핀란드 경제 살린 벤처 생태계
핀란드 경제를 수렁에서 건진 것은 벤처 창업이다. 노키아라는 거목이 쓰러진 화재의 현장에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고 있는 것이다. 노키아를 떠난 2만 명의 정보기술(IT) 인재들 중 상당수가 창업의 길을 선택해 수백 개의 벤처 기업을 만들어냈다. 노키아는 퇴직자들의 창업을 적극 도왔다. 창업 자금을 지원하고 특허도 거저 쓸 수 있게 했다. 노키아의 인재 독점이 저절로 풀리면서 젊은이들도 창업 대열에 가세했다. ‘스타트업 사우나’로 불리는 대학생 창업 지원 프로그램에 인재들이 몰렸다.

핀란드 정부도 발벗고 나섰다. 노키아 살리기에 대한 미련을 일찌감치 버리고 창업 지원에 정책을 집중했다. ‘한 개의 노키아 대신 100개의 작은 노키아를 만들자’는 구호를 내걸었다. 남아 있던 규제를 과감히 걷어내는 동시에 직접 벤처캐피털을 조성했다. 매년 될성부른 아이디어와 기술을 가진 창업자 3500여 명씩을 지원했다. 대학과 연구기관, 금융기관 등도 적극 협력했다. 돈을 대주면서 담보나 보증을 요구하는 일은 애당초 없었다. 설사 실패해도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사회안전망은 이미 잘 작동하고 있는 터였다. 그 결과 세계적인 스마트폰 게임인 앵그리버드를 개발한 로비오 같은 기업들이 잇따라 탄생했다.

하지만 벤처만으론 부족했다. 글로벌 경제위기가 겹치면서 노키아 외에 다른 대기업들도 곤경에 처했기 때문이다. 외국인 투자 유치가 필요했다. 하지만 유럽연합(EU) 안에선 이웃 나라들도 경제가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그 틈에 밀고 들어온 게 러시아 자금이다. 핀란드의 첨단 쇄빙선 제조회사인 아크테크 헬싱키를 러시아 국영 조선회사가 곧 인수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핀란드는 경영난에 직면한 한 원자력 발전소의 지분 33%도 러시아에 내주기로 했다.

오일 머니 등으로 무장한 러시아의 신흥 자본가들은 요즘 핀란드 진출에 열을 올리고 있다. EU 진출의 교두보로 핀란드만 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핀란드는 요즘 대EU 교역이 줄어드는 반면, 대러시아 교역은 부쩍 늘고 있다. 과거 소련의 침공을 받았던 핀란드였기에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에 대해 우려하는 국민도 많다. 그러나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네 탓’ 공방 만 하다간 중국 자본 쾌재
이제 한국으로 돌아와 보자. 요즘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두 기업이 혹시 잘못될까 걱정하는 소리가 부쩍 커지고 있다. 둘의 어깨에 걸린 한국 경제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노키아 전성시대의 핀란드 상황을 능가할 정도다. 삼성과 현대차가 쓰러지더라도 한국 경제가 핀란드처럼 빠르게 복원될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할 공산이 크다. 훨씬 긴 시간과 큰 고통이 따를 것으로 봐야 한다.

핀란드는 한국보다 몸집이 훨씬 가벼운 나라다. 인구가 540만 명으로 한국의 11%이며, 국내총생산은 한국의 23% 규모다. 한국이 하마급이라면 핀란드는 노루급이다. 반면에 국가적 혁신 역량과 사회안전망, 사회적 자본 등은 핀란드가 월등하게 앞서 있다. 핀란드의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의 2배다. 사업에 실패하거나 실직을 당해도 국가가 상당 기간 생계를 지원하며 재기의 시간을 벌어준다. 부패와 규제, 관료주의도 한국과 비교하면 거의 없다. 대화와 협력, 신뢰와 배려의 공동체 문화도 쌓여 있다.

핀란드는 한국이 가야 할 길을 냉정하게 알려준다. 삼성과 현대차 이후의 경제를 더 일찍, 더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예 경제의 판에서 둘의 자리를 지워버린다는 각오가 요구된다. 자식을 출가시키는 부모 심정처럼 말이다. 앞으로 글로벌시장에서 둘이 오래 버티며 내는 성과는 고마운 덤 정도로만 생각하고, 국내 경제는 백지 상태에서 새 판을 짜는 것이다. 벤처와 중소·중견기업, 내수·서비스 산업을 중심으로 일자리가 쑥쑥 생기도록 말이다.

모두들 위기를 얘기하지만 절박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서로 ‘네 탓’ 공방을 하기에 바쁘다. 기업가 정신도, 창조경제도 구호와 이벤트로 흐르고 있다. 그렇게 허송세월하다 주저앉으면 결국 중국 자본이 쾌재를 부르며 덤벼들 것이다.

김광기 중앙일보 경제연구소 부소장 kikw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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