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61)제19화 형정반세기(4)-권영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이조 각종 형구>
벌이라고 하는 것이 아무리 죄와 값이라고 하지만 우리 나라에는 너무나 잔인한 형이 많았고 특히 그 집행에는 남형의 폐가 컸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형벌로 일반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태형이 폐지된 것은 l920년4월 1일에 이르러서였다. 그때 조선 총독부 경무 총감 수야가 특별담화를 발표해 조선사람에게 행하던 태형제를 폐지하고 대신 구류나 징역형으로 바꾸겠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개화가 되면서 태형제는 각계에서 반대해 왔으나 이 발표를 제일 반가와 한 것은 한일합병 이전부터 관계요로에 태형의 폐기를 주장해오던 「스코필드」박사(당시 「세브란스」병원의사)로 그는 과학적 근거를 들어 태형의 폐지를 주장해 오던 터였다.
박사는 볼기맞은 사람들을 숱하게 치료했었는데 조선사람의 신체구조 및 영양상태 등으로 미루어 견딜 수 있는 최대의 태형도수가 20대 정도라고 주장, 60대 심지어 90대까지 몰아치면 사람의 힘으로 감당치 못하고 변을 당하기 쉽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태형폐지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들의 주장인즉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어버이가 아들을 가르치는데 엉덩이에 매질하는 것이 진리이거늘, 나라가 어버이요, 백성이 아들인 이치로 따져 빗나간 아이들의 엉덩이를 쳐 가르치는 이 태형을 폐지함은 진리를 위배하는 것이요, 천리를 거역하는 것이라』고 시비가 엇갈리기도 했다.
우리가 흔히 혼이 났을 때 『치도곤을 맞았다』는 말을 쓴다. 이 치도곤은 이조때 쓰인 형구의 하나로 여러 곤장 가운데 엄벌을 내릴 때 쓰던 것이었다.
버드나무로 넓적하고 길게 깎아 만들어 죄인의 볼기를 치는 이 몽둥이는 예부터 군에서 도둑질을 한 군인을 다스리던 곤장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조 때 일반관청이나 이른바 양반계층에서도 쓰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형구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태이다. 태는 흔히 태형이라고 하는데 싸리나무로 만든 회초리이다. 싸리나무의 옹이와 나무눈을 깎아버린 뒤 관의 검사를 받고 사용되도록 되어 있다.
먼저 죄수를 형틀 위에 엎드리게 하고, 허리 부분과 두 다리 사이 첫 관절 부분을 요동하지 못하도록 형틀에다 새끼 꼬는 헝겊 끈으로 동여맨다. 그리고 바지를 벗겨서 엉덩이 부분을 드러나게 해서 형을 가하는데 매가 잘 꺾어져 많은 수량이 필요했다. 그래서 형을 받을 사람이 미리 준비해 가는 것이 판례. 매를 들고 가서 매를 맞고 오는 꼴이었다.
죄인이, 부녀자일 경우에는 홑치마나 홑바지를 입은 채로 형을 받게 했으나 다만 간통죄 때만은 예외였다. 거의 수형으로 남자와 마찬가지로 홀랑 벗겨놓고 매질을 했다. 이와 비슷한 형구가 장. 태보다 약간 굵은 나무로 만들었는데 죄인에게 가하는 돗수가 달랐다. 죄인에 목을 죄는 나무칼은 가였다. 이는 죄인의 도주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다. 사형수에게는 25근짜리, 도류형에는 20근, 장죄에는 15근짜리를 썼다.
「리델」신부의 옥중수기에 의하면 『두껍고 길쭉한 널빤지 끝에 사람 목이 들어갈 구멍을 내고 입구에 나무쪽을 끼워 비녀장을 지르게 되어 있다』고 적혀있는 것처럼 요즘 사극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가와 비슷한 것으로 피향목도라는 것이 있었다. 널빤지 양쪽 끝 부분에 구명을 내어 두 사람의 목을 끼워 마주보게 하는 것.
이밖에도 요즘의 수갑과 같은, 나무로 만든 수갑류, 쇠줄로 경범자를 묶는 철삭(일명 사슬쇄), 발목에 채우는 쇠사슬(요)이 있었다.
이러한 것이 기본 형구였다. 또 쇠사슬로 죄인의 목을 죄는 항쇄, 무거운 죄를 범한 사람의 발을 묶는 족쇄란 것도 있다. 그 형태는 여러 명의 죄인을 왼쪽·오른쪽 한발씩 묶은 뒤 자물쇠를 채워놓는 것이다.
당시 행정의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지금은 절대로 금하고 있는 고문이 공공연히 행해졌다는 사실이다.
요즘은 경찰관이 피의자 따귀 한 차례만 갈겨도 「인권유린」이라고 마구 떠들어대지만 과학수사와는 거리가 멀었던 당시에는 단죄의 기본은 자백이 중요한 조건이었기에 그 수단으로서의 고문이 공인되었었다고 한다. 이때 쓰이는 막대기를 신장이라고 했으며 약1m의 막대기로 죄인의 종아리를 두둘겼는데 한번 고문에 30도를 넘지 못하며 고문 뒤 3일 이내에는 다시 못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인된 고문 못지 않게 법외형으로의 단근형이 성행했다고 한다.
이 형은 죄를 지은 육체를 죄만큼 베어 내거나 도려냄으로써 보상을 하게 하는 지극히 원시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가령 남을 비방하거나 모함한 자는 그에 사용된 혀를 잘랐고(단설형), 남의 유부녀를 욕보이거나 간통했을 경우 남자의 양근을 잘랐고(궁형) ,강도질을 했을 때는 팔다리를 잘랐고 (양수절단형), 절도질을 했을 때는 발소리를 내지 않고 남의 집에 들어갔다 하여 복사뼈를 발가냈다(거근 절단형)고 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알아둬야 할 것은 관가의 엄포가 일방적으로 통했던 때이니 만큼 이에 따른 뒷거래가 상당히 공공연했었다는 것이다.
뇌물을 받고서는 종이로 만든 몽둥이에 붉은 칠을 한 지장으로 비명과 웃음을 함께 섞어가며 매를 맞을 수 있었고 『몹시 쳐라』는 명령이 있으면 요술사와 같은 형리들의 장난으로 안 아프게 매를 맞을 수 있었다. 형리는 곤장을 세차게 휘둘러대며 내리치지만 곤장 끝 부분으로 먼저 죄인을 묶은 형틀을 치며 그 반동으로 볼기를 친다. 『피가 나도록 때려라 하면 미리 사금파리 잔 조각을 볼기 위에 올려놓고 치면 가벼운 한 대에도 유혈이 낭자하게 만들곤 했다. 마치 요즘 흔한 「프로·레슬링」의 「트릭」과도 같은 수법이었다고나 할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