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남과 북의 포로수용소(14)|「도드」준장의 피랍(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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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마크·클라크」대장은 공산포로들에게 굴욕적인 양보를 하고 「도드」준장이 석방된 지 이틀만인 5월 12일에 「매튜·B·리지웨이」대장으로부터 「유엔」군 총사령관의 직책을 이어받았다.
싫건 좋건, 이제 거제도 포로 문제의 뒤치다꺼리는 「클라크」책임 하에 진행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일단 「유엔」군 사령관에 취임하자 놀랄 만한 과단성을 발휘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질서를 확립했다. 장군의 저서 『「다뉴브」강으로부터 압록강까지』(From the Danube to the Yalu)에는 이때의 사태 수습상황이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클라크, 보도관제를 해제>
여기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클라크」대장이 현지 8군사령부의 생각과는 달리, 두 포로수용소 사령관의 책임을 물어 강등불명예 제대처분을 시킨 것과 이때까지 보도 관제됐던 거제도 수용소의 내막을 샅샅이 일반에 알렸다는 점이다. 장군은 그 동안의 공산포로들 난동이 보도됐더라면 「도드」피랍 같은 치욕적인 사건은 미연에 방지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있다.
"「도드」준장이 석방된 후 이틀 동안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국의 전황, 휴전회담, 일본의 정치정세와 방어 문제, 「유엔」군의 배치정황, 한국의 정치 및 경제사건 등, 「유엔」군 사령부와 관계된 여러 문제에 관한 「브리핑」을 들었다.

<비행기로 도망가고 싶던 심정>
나는 12일 하오 「리지웨이」장군이 우전 비행장을 떠날 때 사령관직을 완전히 인수하기로 돼 있었다. 그날 아침에 실질적으로 사령관직에 취임하기 전에 나는 동경 제일「빌딩」에 있는 「리지웨이」장군의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이때 「리지웨이」장군으로부터 「정식 사무인계를 하오3시 대신 상오10시에 했으면 어떻겠느냐」는 전화가 왔다. 며칠 전에 그가 「언제 사무인계를 하면 좋겠는가」라고 물었을 때 나는 「포로문제를 생각하면 몇 달을 더 기다리고 싶소」하고 농을 하며 웃은 적이 있었다. 「리지웨이」가 출발 준비를 위해 예정보다도 5시간 빨리 사무인계를 요청할 때에도 될 수 있으면 천천히 했으면 했다. 솔직한 심경은 비행기를 집어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생각이었지만, 그렇게도 할 수 없는 이상 나는 「리지웨이」청을 들어주었다. 이래서 5월12일 상오10시부터 내가 정식으로 「유엔」군 총사령관이 된 것이다.
「도드」장군은 석방된 후 서울에 있는 8군사령부로 호송되었다. 그와의 기자회견은 금지되었고, 그의 석방이 발표된 36시간 후에도 「콜슨」장군이 서명한 각서 내용도 발표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기자들은 「도드」사건의 진상을 알아내려고 혈안이 되었다.
「콜슨」준장의 각서를 비롯한 「도드」사건은 비밀에 붙여져 있어 언론계에서는 여간 불만이 아니었다. 내가 여기서 한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나도 2차 대전 중 북「아프리카」나 「이탈리아」에 있을 때 늘 기자들에게 비밀을 숨기지 않고 때로는 며칠 뒤나 또는 몇주일 뒤에 발표해야 할 정보를 미리 제공해주는 정책을 취했다는 것과 나의 이런 신임을 배반한 기자는 한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거제도 사태의 진상도 마땅히 기자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콜슨」성명 무효선언>
「리지웨이」장군의 작별 의장대 사열식이 거행되는 동안 나는 그에게 거제도 사태에 관한 성명을 발표해야겠다는 것을 귀띔해 주고 나의 성명사본 한 부를 슬며시 넘겨주고 비행기가 떠나면 읽어보고 이에 대한 견해를 무전으로 알려달라고 말했다. 그가 떠난 지 몇분 후에 OK라는 무전을 받았다. 나는 즉시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공산포로들에 대한 「콜슨」준장의 회답각서는 「도드」준장의 생명을 노리는 중대 위협 하에 행해진 것이다. 그들의 요구는 명백한 공갈이었으며, 「콜슨」준장의 모든 언질은 이런 위협적인 요구의 결과로 해석되어야 한다.
거제도에서 발생한 모든 폭동은 수용소 안의 질서를 파괴하고 온갖 수단으로 「유엔」군 사령부를 난처한 입장으로 몰아넣으려는 악질적인 공산 지도자들의 계획적인 음모의 결과로 발생한 것이다. 「유엔」군사령부는 포로수용소를 관리함에 있어 「제네바」협정을 준수하였다. 유혈을 가져온 몇 차례의 사건은 공산 포로들의 고의적인 선동에 의한 것이며 그와 같은 사건에서 「유엔」군이 무기를 사용한 것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도드」준장은 12일 저녁에 서울의 8군사령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포로들의 요구는 이론에 닿지 않는 것이며 수용소 당국의 양보는 별로 중대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밤새워 가며「워싱턴」과 숙의>
「밴플리트」는 나에게 보낸 서신에서 「도드」준장과 같은 견해를 표명했다. 「밴플리트」는 「도드」사건의 책임소재를 규명하기 위하여 S군이 소집한 장교회의는 「콜슨」준장이 포로와의 교섭에서 침착성과 현명한 판단력을 보였다고 판정했으며 「도드」가 납치된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견해를 표명한 것을 보고 나는 사뭇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육군장관「프랭크·페이스」나 합동참모본부의장 「오머·브래들리」원수는 모두 사건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워싱턴」관리들은 내가 느낀 바와 같이 포로들이 수용소 지배권을 장악하고 수용소 사령관이 납치되고 그 후임 사령관은 납치된 사령관을 석방하기 위해 굴욕적인 양보를 했다는 사실의 배후에는 그 무슨 잘못된 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한 후 처음 72시간은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을 지경으로 바빴다. 「워싱턴」에 제출할 보고를 작성하고 국방성과 수시로 「텔리컨」통신연락을 해야 했다.
거제도 사건이 발생한 후 「워싱턴」과 동경 사이의 무전통신이 쉴새 없이 계속되었다. 「브래들리」원수는 5월12일 상오10시에 「텔리컨」통신 연락을 하자고 제의했다. 「워싱턴」의 상오10시는 동경의 밤중이다. 나와 참모들은 「브래들리」원수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밤새도록 통신실에 앉아 있었다. 통신이 끝난 것은 동경시간으로 아침 5시였다.
「브래들리」장군은 통신을 끝마치고 「고맙소, 장군. 그럼 잘자오」하고 밤 인사를 하였다. 나는 「밤은 무슨 밤입니까. 지금 여기는 아침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워싱턴」관리들이 거제도 사태 수습에 있어 사건조사는 현지에 있는 우리에게 일임하고 너무 간섭하지 말도록 요청했다. 당시의 내 태도는 과거 일은 잊어 버리고 장래를 위해 사태를 바로 수습하자는 것이었다. 사태를 바로 잡으려면 「도드」와 「콜슨」의 두 준장을 조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트너」준장을 수용소장 임명>
8군 장교 조사단의 보고에 불만을 느낀 나는 당시 나의 참모부장이었으며 후일 「유엔」군 정전위 수석대표가 된 「블랙쉬어·M·브라이언」소장을 장으로 하는 새로운 조사단을 임명했다.
나는 「콜슨」준장의 후임으로 미 제2사단부 사단장 「헤이든·L·보트너」준장을 거제도 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하고, 일본에 있던 187공정연대를 포함한 증원경비대를 거제도 투입했다. 신임 조사위원단의 보고에 따라, 나는 「도드」와 「콜슨」준장을 각각 대령으로 강등시키도록 건의했고, 「워싱턴」당국도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나는 거제도 폭동 및 유혈 사건에 관하여 은폐된 사실이 있음을 깨닫고 과거의 사건 전모를 사실대로 발표하기 위하여 이에 대한 육군성의 허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육군성은 이런 발표가 휴전회담에 좋지 못한 영향을 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인지 나의 요청을 허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폐됐던 사건들은 폭로되고 말았다. 「도드」피랍 사건이 발생했을 때 신문기자들은 거제도로 들어갈 수 없었지만 그 사건이 끝난 후 기자들의 출입금지는 곧 해제되었다. 기자들은 얼마 안가서 8개월간에 걸친 거제도 수용소 폭동의 복면을 벗겨 버렸다. 그러한 사건의 대부분은 그때까지 발표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유엔」군 사령관으로 취임한 후 곧 포로수용소에서 발생한 모든 사건을 즉시 발표하도록 지시했다.

<육군성에서 사건 공표 금지>
나는 2차대전 시「이탈리아」에 있을 때 모든 사건에 관한 「뉴스」는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기자들에게 알려주어야 하며 비밀보지상 필요하다면 비밀을 지킨다는 약속을 받고라도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기보다 실제적인 것이다. 비밀은 탄로되기 마련이며, 어떤 사건을 숨겨두려는 관변측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탄로될 경우에는 소문은 항상 침소봉대되기 쉬운 것이다.
거제도 사건이 발생하기 시작할 때, 즉 「도드」준장이 납치되기 8개월 전부터 그와 같은 사건이 신문에 보도됐다면 「도드」사건의 발생을 가능케 한 상상하기도 힘든 거제도 사태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수용소 당국은 이런 사건이 신문에 나지 않도록 무척 애를 썼다. 수용소 당국자들은 휴전이 멀지 않아 성립될 것이며, 휴전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희망과 더불어 거제도 포로들의 폭동과 유혈사건이 보도되면, 이는 공산 측에 휴전을 지연시키기 위한 또 하나의 구실을 줄지도 모른다는 염려에서 포로문제에 관한 모든 보도를 억제했었다.
「도드」사건이 발생하기 이틀 전에 「리지웨이」장군이 거제도 사태에 대해 8군사령관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공산지도자들의 도발과 대담성이 증대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를 표명한 것은 흥미 있는 사실이다.>
◆주요일지 (1950년12월21·22·23일)
※12월 21일 ▲적, 춘천에 투입 ▲「유엔」신한위, 업무보고 ▲평양방송 재개 ▲「트루먼」대통령, 「나토」군 설치 찬양
※12월 22일 ▲미 F86, MIG 6대 격추 ▲이 대통령, 문산 시찰 ▲중공, 「유엔」의 정전안 거부 ▲국부「게릴라」, 광동 비행장 기습
※12월 23일 ▲「워커」8군사령관, 교통사고로 순직 ▲8군사령관에 「매듀·B·리지웨이」중장 취임 ▲이 대통령, 주한「유에」군에 사의 표명 ▲「트루먼」, 현 세계정세 대처에 최선 다하겠다고 다짐
※알림=「민족의 증언」문의나 연락전화는 (28)8211(교환)의74, 야간과 일요일은(94)3415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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