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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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방학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서울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 보여서 며칠 전에는 분질러 여행을 떠났다. 시골길은 여전히 먼지투성이고 흔들리고 위험했다. 고속도로를 달린 다음이라 도무지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게딱지같은 초가 지붕이 군데군데「시멘트·슬레이트」로 바뀌고 더러는 파랗고 빨간 칠을 한 집도 있어 조금은 살기가 나아졌나하는 생각이 들어 흐뭇했다. 그러고 보면 원두막도 퍽 현대화해서 생철 지붕을 이고 제법 정자처럼 꾸민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연변 풍경보다도 시골길을 달리면 으레 만나는 정다운 친구들이 있다. 그것은 차 탄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꼬마들이다. 그들은 번번이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면서 타관 손님들에게 미소를 보낸다. 지금은 그만해도 눈에 익어버렸지만 처음 그런 손짓을 하는 꼬마를 보았을 때 나는 너무나 고마와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전에는 차가 지나가면 아이들이 우르르 길가로 몰려나와서 괴상한 시늉으로 승객에게 욕을 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 그들의 눈에는 증오와 적의가 번득였다.
그런 나라의 수치를 깨끗이 없애고 이렇게 아름다운 풍습을 퍼뜨린 것이 만약 어느 개인의 창의라면 마땅히 문화 훈장 감이다. 그것은 백 번 도의를 외치는 것보다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도 처음 시작했을 때와 같지 않고 점점 시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대단히 섭섭한 일이다. 이것은 물론 첫째로 차를 탄 사람들에게 잘못이 있다. 거만하게 버티고 앉아서 옛날에 아이들이 못된 시늉을 하던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표정으로 그들의 손짓을 무시해버리기 일쑤다.
그러면 꼬마들은 무안한 상을 하고 지나가는 차를 바라본다. 그러면 그 차는 그들의 얼굴에 숨이 막힐 듯한 먼지 구름을 뒤집어씌우고 달아나 버린다.
이런 꼴을 한번 당하고 두 번 당하면 아무리 선생님의 가르침이라도 손을 흔들어 차안의 손님을 맞을 기분이 나겠는가?
나는 꼬마들의 고사리 손을 보고, 밭을 매다가 호미 질을 멈추고 우두머리 차를 바라보고 있는 아주머니들을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런 아주머니들에게 차 탄 사람 쪽에서 먼저 손을 흔들어 인사하면 어떨까? 장에 갔다 오는 길에 차를 만나 점잖게 길 앞으로 비켜서는 할아버지께도 이쪽에서 인사를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이 십리 길을 걸어서 통학하는 중학생들에게 울긋불긋하게 차려 입고 바캉스를 즐기러 가는 남녀 대학생이 먼저 손 흔들어 얼마나 고생스러우냐는 위로와 이편이 너무 편안하고 화려한데 대한 미안한 마음을 함께 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정병조<성균관대 유학 대학 장·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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