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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남과 북의 포로수용소(12)|「도드」준장의 피랍(1)|「6·25」20주…3천여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1952년 5월7일 아침 거제도포로수용소장 프란시스·도드 준장은 제76수용소 포로대변인으로부터 면회신청을 받았다. 공산주의자의 흉계나 멀리 북쪽의 평양으로부터 여기 수용소 안에 비밀지령이 전달된 것을 모르는 도드 장군은 아무런 의심도 갖지 않았다. 과거의 전쟁경험으로 보면 포로들이란 의식과 거처를 제공하고 모든 전쟁포로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 제네바 협정을 준수하면 된다. 그리고 포로들에게 군사기밀을 강제로 자백시켜서는 안되며 모든 것을 인도적으로 대우해야한다.

<흉계 모르고 면담에 응해>
이것이 서방세계가 갖고 있는 전쟁포로에 대한 개념이며 도드 준장도 이런 정신에 젖어 있었다. 도드 자신도 휴전회담이 시작되고서 부 터 수용소에서 반공·친 공 포로들의 충돌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는 것쯤은 알았지만 사태를 그리 심각하게는 보지 않고 있었다. 하물며 포로들이 바로 자기를 인질로 잡으려고 치밀한 계획을 짜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흰 별이 하나 달린 모자를 쓰고 76수용소에 또 무슨 말썽이 일어났는가를 보러 갔다.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수용소문 앞에서 지프를 내리고 모여선 공산포로 대표들과 만났다. 문은 열려있었고 철조망 밖의 미군경비병은 별로 경계의 빛도 없이 이 회견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안간 누가 신호를 하자 미리 치밀한 사전준비와 예행연습까지 했던 포로들은 도드 준장을 둘러쌌다.
그는 꼼짝 못하고 잡혀서 수용소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나무토막 같은 것이 놀란 경비병에 던져지고 눈 깜짝할 사이에 문이 닫혀버렸다. 경비병들은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렇게 해서 수용소장이 포로들에게 잡히는 사상 유례없는 일이 벌어졌고, 이 사건을 계기로 휴전회담과 관련된 공산포로들의 소름끼치는 거제도반란전모가 적발되었다.
또한 이와 아울러 그 동안 허술했던 수용소관리의 허점이나 맹점 등도 드러나게 되었다. 미군 당국자들은 뒤늦게나마 거제도포로수용소 안도 일선 못지 않은 전쟁터며 공산포로는 과거의 전쟁포로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다루지 않을 수 없다는 교훈을 얻게된 것이다.
그럼 먼저 우연히도 도드 준장의 피랍과 그후 사태에 깊이 관여했던 한국군장교로부터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어보겠다. 이 장교의 증언은 미군관계기록이나 자료와는 좀 상치되는 대목도 더러 있다.

<이학구 으시대며 흥정 벌여>
▲한무준씨(당시 거제도포로수용소 미군 정보 처 근무=중위·예비역 육군대위·현 영등포고등학교 교사·44) <5월7일 아침에 도드 준장의 전속 부관이 나를 찾아와 하오1시에 장군사무실로 오라는 거예요. 전에도 내가 도드 장군의 통역을 종종 했기 때문에 또 그런 일로 오라는 걸로 생각했어요.
나는 점심을 먹다 깜빡 예정시간을 잊고 1시40분에 장군한테로 가니까 기다리다 76수용소로 포로들과 면담하러 나갔다는 거예요. 장군은 그전에도 몇 번 말썽 많은 76수용소에 간 적이 있어요. 나는 그대로 서성거리고 있는데 오후3시쯤 수용소 부 소장 빌·크레이그 대령이 나를 불러요. 지금 도드 장군이 76수용소에 납치됐는데 이학구를 불러 대책을 의논하겠으니, 통역을 하라고 해요. 나는 어리둥절했어요. 얼마 있으니까 공산포로들의 대변인격인 이학구가 자기전속통역을 데리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들어옵디다. 크레이그 대령이 도드 피랍이야기를 하니까 이는 웃으며 좋아합디다. 크레이그 대령은 곧 석방하도록 하라고 했어요.
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아주 으시대며 자기 전속통역에게 이렇게 말해요『인민군 총 좌 이학구는 피랍 된 미 육군 준장 도드를 석방시켜 줄 수 있다고 말하라.』
크레이그 대령은 이 말을 듣고는 즉시 76수용소로 가자고 달라붙었어요.
그런데 이는 다시 흥정조건으로 프로대표단의 인정을 내놓았어요. 크레이그 대령은 그 문제는 도드 준장이 석방된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하니까 이는 안 된다고 잘라 말합디다. 그러면서 자기가 직접 76수용소에 들어가서 도드를 만나 단판 짓겠다는 거예요. 포로들이 소위 대표단을 구성하려고 한 것은 그들이 각 수용소를 자유로이 드나들며 지령을 직접 전달하려고 한 것이지요.
이때 도드를 납치한 76수용소에서 이학구를 불러다 달라는 연락이 왔어요. 나는 이와 같은 지프를 타고 76수용소로 갔는데 이는 문 앞에서 대표들과 무슨 이야기를 하더니 안 들어가고 돌아 나와요.

<도드 구출 못하게 장소 전전>
이 동안에 크레이그 대령은 다시 장교수용소의 부대변인 격인 신태봉 중 좌를 불러다 76수용소로 보냈어요. 이러다가 날이 저물었는데 76수용소에서는 다시 각 수용소의 대표들을 그리로 집합시켜달라는 요구조건을 들고 나왔어요.
미군당국은 그 요구조건도 들어주었어요. 이날 밤에 76수용소 안에서는 소위 프로대표단 결단식을 갖고 북괴·중공·소련 기를 올리고 만세를 부르며 야단법석을 떱디다. 참 기가 찬 노릇이지요. 이학구를 비롯한 각 수용소 대표들은 도드 준장이 석방될 때까지 76수용소에 머무르면서 미군당국에 제시할 협상조건을 짜는 등 별의별 짓을 다했어요.
7일 밤늦게 수용소 안에 갇혀있는 도드 장군으로부터 정문초소에 전화가 걸려왔어요. 이 전화는 내가 받았는데 오늘밤은 수용소 안에서 자게됐으니 침구와 저녁식사를 들여보내라는 내용이었어요. 어느새 수용소 안에는『우리는 지금 도드와 단판하고 있다』고 광목 천에 붉은 잉크로 쓴 플래카드를 걸어 놓고요. 사태가 이렇게 되니까 미군당국은 도드 장군을 긴급 구출해내 올 계획을 짜기 시작하더군요.
도드 장군은 처음에 정문초소 앞에서 포로대표들과 면담을 하다가 오물을 메고 나오던 포로들에 의해 납치돼서 철조망 안에 있는 관리실에 감금됐어요. 이 관리실은 보급품을 쌓아둔 곳인데 미군사무원과 포로들이 필요할 때 드나들었는데 이때는 76본 수용소 공기가 불온하여 미군사무요원들은 발을 끊다시피 했어요. 그래서 미군은 본 수용소와 관리사무실 사이를 십자포화로 비상차단하고 도드를 구출해보려고 했어요. 이 기미를 알아챘는지 포로들은 야음을 이용, 10여명이 도드를 둘러싸고 관리실 뒷문으로 빼내어 포로막사 사이를 갈지 자(지)형으로 돌며 깊숙이 들어갑디다.

<도드, 발포하지 말라 부탁>
이렇게 되니까 도드 장군이 어느 막사에 들어갔는지 분간 못하게 돼 결국비상 구출계획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7일 밤은 그대로 보내고 이튿날 아침에 미군은 방송으로 도드 장군에게 가해할 경우 포로전체에 책임을 묻겠다고 했어요. 또 9일 아침 8시까지 석방시한을 정하고 이 시한을 안 지키면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통고 하구요. 8일 저녁에 도드 후임으로 수용소장에 찰즈·F·콜슨 준장이 부임해왔어요. 미군은 76수용소 뒤 언덕에 CP를 차리고 전투태세를 완비, 대기했어요. 나도 8일과 9일 밤을 이 CP에서 새웠습니다. 9일 8시가 돼도 소식이 없으니까 미군 탱크 21대가 76수용소를 포위하고 일촉즉발의 상태였어요. 5분쯤 후에 도드 준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는데 무사히 있으니 발포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잉크와 타이프 용지를 들여보내 달라기에 그대로 했어요. 결국 도드 장군은 11일에 콜슨 신 수용소장이 굴욕적인 포로요구문서에 서명하고 풀려 나왔습니다. 이 사건의 여파는 심각해서 우선 도드·콜슨의 두 장군이 불명예 제대되고 그후 거제도의 공산포로들이 따끔한 맛을 보게됐지요.

<소장 해임하고 새 소장 임명>
다음은 미군관계 자료와 기록을 통해 이 사건을 살펴보겠다. 우선 나토사령관으로 영전되어 유엔 군 사령관직을 마크·클라크 대장에 인계하고 있을 때 이 사건에 접한 마슈·B·리지웨이 장군의 견해와 사태수습경위를 그의 저서 한국전쟁(The Korean War)에서 간추려보겠다.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는 아이젠하워 원 사 후임으로 나토사령관에 임명되어 유럽으로 출발하기 4일 전에 이 벼락같은 소식이 들어왔다. 이미 내 후임인 마크·클라크 대장은 동경에 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골치 아픈 문제를 클라크 책임으로 넘기기보다는 나 자신이 8군사령관 밴플리트 대장과 함께 해결할 결심을 했다. 그리고는 클라크와 즉시 한국으로 갈 계획을 세웠다. 내가 한국에 도착하기 사령관은 공산포로에 잡혀있는 도드를 수용소장 직에서 정식으로 해임하고 그 후임에 미1군단참모장 찰즈·f·콜슨 준장을 임명했다. 콜슨 준장은 5월8일에 거제도에 부임하여 공산포로들에게 도드는 수용소장이 아니며 지정된 시간 안에 그를 무사히 석방하지 않으면 미군은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경고했다.< p>

<밴플리트 협상계획 좌절>
한편 공산포로들은 도드 준장이 중재자역할을 할 것에 동의했다고 하면서 포로대표단의 인정과 각 수용소간의 전화와 차량연락 허용 등의 요구조건을 제시해왔다. 나와 클라크가 김포에 도착하니까 밴플리트는 도드 석방을 위해 포로들과 협상할 계획인데 어떠냐고 물었다. 협상을 한다면 석방이 적어도 48시간이 지연되고, 또한 그렇게 되면, 포로에 굴복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나는 이 계획은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주요일지>(1950년 12월15, 16, 17일)
※12월15일▲중공군, 시 변리에 진출▲정부, 국회에 부역자처리법 개정안제출▲미, 주 방위군 2개 사단 연방군에 편입▲미 하원, 1백60억불의 추가군사비 통과
※12월16일▲미군, 함흥포기▲적 패잔병 오대산서 준 동▲국민방위군법안 국회통과▲트루먼, 국가비상사태선언에 서명▲미 재무 성, 미국 내 중공 및 북괴재산 동결
※12월17일▲B29, 원산폭격▲미 공군F-86 제트기 첫 출전▲이 대통령, 춘천·원주지방시찰▲11월9일의 신의주폭격 이래 침묵중인 북괴방송, 17일 밤부터 강계서 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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