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수완의 My Sweet Zoo <4> 사자 여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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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여비
올해로 15살이 된 여비. 나이가 들면서 활동력이 많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강인하고 늠름한 모습이다.

지난 1999년 8월 2일. 삼성 라이온즈 이승엽 선수가 43호 홈런을 치며 한 시즌 국내 최다 홈런 신기록을 갈아치우던 날은 우리나라 프로야구 역사상 길이 남을 하루였다. 그런데 같은 시각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 동물원에서도 기쁨의 탄성이 터졌다. ‘이제 더 이상 전국 일주를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2008년 혁이
이승엽 선수가 아들 은혁군과 에버랜드를 방문해 새로 태어난 아기 사자에게 `혁이` 라는 이름을 지어 줬다.

무슨 소리인가? 전국일주라니. 사연은 이렇다. 그에 앞서 1999년 6월 4일 에버랜드 동물원 사파리에 아기 사자 한 마리가 태어났다.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는 새끼가 태어나면 어미가 잘 돌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데 이 아기 사자도 그랬다. 그렇게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할 때는 아기의 건강을 위해 인공 포유를 한다. 사육사가 데려와 기르는 것인데 말이 인공 포유일 뿐 신생아를 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무튼, 인공 포유를 시작한 지 1개월이 지났을 무렵 아기 사자는 제법 튼튼해져 맹수의 위용을 갖춰가고 있었다. 그맘때 언론에서 삼성 이승엽 선수가 국내 프로야구 한 시즌 홈런 신기록 수립에 다가서고 있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때 누군가 “쑥쑥 자라는 아기 사자의 기운을 동원해 이승엽 선수의 홈런 신기록을 기원해 보는 건 어떨까? 그리고 기록이 수립되는 날 이놈 이름을 이승엽 선수에게 지어 달라고 부탁하자”라고 얘기했다. 프로야구 선수가 직접 맹수의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다. 삼성 야구단 홍보팀에 연락해 동물원의 의견을 전달했고, 기록이 나오는 날 아기 사자의 이름을 짓기로 결정했다.

1999년 여비
43호 홈런을 때려 한 시즌 국내 최다 홈런 신기록을 세운 이승엽 선수와 `여비`

정말 무더운 여름이었다. 42호 홈런이 터진 7월 25일부터는 특히 더 더웠다. 홍보팀 직원과 동물원 사육사는 아기 사자와 함께 잠실ㆍ대구ㆍ인천을 찾았다. 언제 홈런을 칠까 초조하게 기다리며 경기를 보는 것이 참 힘들었다고 사육사들이 전해왔다. “빨리 홈런 좀 쳐 주세요!“ 야구기자보다 내 마음이 더 급해졌다. 아기 사자의 건강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주일 뒤. 이승엽 선수가 대구 구장에서 롯데를 상대로 43호 홈런을 터뜨렸다. 경기 후 아기 사자 명명식에서 ‘여비’라는 이름이 처음 나왔다. 이승엽 선수가 자신의 이름 끝 글자인 ‘엽’에서 따와 지어줬다.

이승엽 선수는 단순히 이름만 지어주고 여비와의 관계를 끝내지 않았다. 일본에 진출하고서 슬럼프에 빠졌을 때는 에버랜드 동물원을 찾아 여비를 보고 힘을 얻었다고 한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최종예선 경기를 마치고는 부인, 아들과 함께 여비를 만난 자리에서 당시 태어난 아기 사자에게 아들 은혁 군의 이름을 따 ‘혁이’라고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혁이는 지난해 여름 한ㆍ일 통산 500호 홈런 기록 달성을 기원하기도 했다.

요즘은 동물원에서 새 생명이 태어나면 페이스북 같은 SNS를 통해 공모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그래서 더 의미 있고 톡톡 튀는 이름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뭔지 모르겠지만 정감있는 느낌은 좀 부족한 것 같다. 복돌이ㆍ힘찬이ㆍ영희 같은 이름이 유행하던 시절도 있었다. 세상은 변하는 것이니 앞으로 10년 뒤에는 정말 어떻게 동물 이름이 지어질지 모를 일이다.

권수완 에버랜드 동물원장·전문위원 대학에서 수의학을 전공했고 1987년 에버랜드(당시 자연농원)에 입사해 지금까지 동물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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