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16)<제15화>|자동차 반세기|서용기(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판매경쟁시대>
자동차 판매경쟁도 실했다. 1938년께다. 공동 「모터즈」의 지배인으로 함남에 부임한 나는 6개월 동안 차 1대도 팔지 못해 전전긍긍했다.
경성에서는 서용기하고 이름만 대도 알아줬지만 함경도지방은 그렇치가 못했다.
그때 함남은 일본인이 경영한 함경 「모터즈」가 판을 치고있었다. 「포드」대리점인 그쪽과 GM사의 대리점인 우리 쪽의 경쟁은 번번이 「포드」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당시 그 지방에서 가장 굵직한 수요자는 야구의 「조선질소비료공장」이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질소비료 공장에선 조선사람의 물건은 구입하러 들지 않았다.
자동차도 예외 없이 일인경영인 함경 「모터즈」와 단골관계에 있었다. 그런 어느 날 공장에서 다시 「트럭」30대를 사들이게 되었다는 정보를 얻었다.
교섭은 해야겠는데 공장 수위실에서부터 접근을 하지 못하게 했다. 들리는 소문은 「포드」대리점과 계약을 했다니 확인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항상 운전 거절에다 전화조차 받아주질 않았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보따리를 싸야겠다고 생각하고 비상수단을 강구했다. 비료 공장 「트럭」운전사들이 시내에서 밥을 먹고있는 사이에 「트럭」안에 숨어들기로 했다.
『우선 만나나 보자』하는 심경뿐이었다. 그때 공장의 사무국장 시도가 깜짝 놀랐다. 어떻게 들어왔느냐는 것이었다.
수위실에서도 모른다. 들어간 것을 본 사람이 없다는 등 내가 잠입한 자체부터가 떠들썩하게 되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우리 차를 사라고 했다. 「포드」보다는 「시볼레」가 쓸만하다면서 차의 특성과 가격 등을 제시하고 흥정했다. 아마 시도는 나 정성에 놀랐는지 이미 계약한 「포드」대리점에 전화를 걸어 약속기일 내에 차를 갖다주지 못하니 해약한다는 통고를 즉석에서 하고 우리 차 30대 매매계약을 해줬다.
3t반 짜리 「트럭」1대에 3천9백50원일 때다.
그 무렵은 정말 차 팔기가 힘들었다. 그대 내 월급은 1백40원으로 차 1대 팔면 50원의 수입이 있어 월 7, 8백원의 수입은 좋이 올렸지만 고된 일 이었다.
사실 1913년께 직거가 「포드」대리점을 시작한 후부터 비롯된 우리 나라의 자동차 판매업은 한동안 직거 상회의 독점상태로 차 사기마저 힘들었지만 불과 15년 사이에 판매경쟁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판매 경쟁이라야 「포드」와 GM사 사이의 싸움이었다.
직거 상회의 독점시대를 끝내게 한 것이 「모리스」상회로 미국인 「모리스」가 「다지」를 팔기 시작한 것이 1920년 후반께 이다. 부사장에는 조선사람 이명원씨도 영어에 무척 능통한 사람이었다.
그때는 차를 사겠다는 사람이 줄지었으니 할만했다.
그후 「포드」대리점으로 흔히들 말하는 「세루」상회라는 것이 등장했다. 직거의 「바통」을 이어 받은 것이다.
「세루」상회는 1932년에 일인 남본에게 넘어갔고 그 무렵 경성 「모터즈」가 GM사의 대리점으로 빛을 보고있었다.
나는 그때부터 자동차 판매업계와 인연이 맺어졌다. 경성 「모터즈」에 있을 때 얼마나 판매성적이 좋았는지 혼자서 1년에 96대를 팔아 GM본사로부터 GM 「오너·클럽」의 회원표지가 새겨진 금 「배지」를 받았던 것이다.
그때 차 값은 「모델·A·트럭」이 3천1백원, 「택시」2천9백원, 「버스」3천9백원 했다.
「트럭」은 특히 할부 판매를 시작하여 1천원만 불입하면 나머지 2천1백원은 1푼5리 이자를 물고 분할 상환토록 해야 고객을 끌 수 있었다. 이 분할상환 때 필요한 공증과 판매담보를 써준 곳이 공익사였다.
1933년께는 경성에서 만도 환석·일신·경성 마생상점·일본·경성 「모터즈」·산본·강천 「다지」·남본상점 등 9개 판매업자가 있었다.
경성자동차에서는 「폰티악」을 8천5백50원, 「비크」1만1천4백50원을 받았다. 「포드」대리점인 남본상회는 지금의 「스카라」극장 앞에서 영업했다. 그곳에선 「포드」제품 18가지를 4천원 안팎에 팔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GM 「대리점」인 경성 「모터즈」는 11가지 제품을 취급했고 환석상회는 「크라이슬러」·「풀리머든드」등을 각각 팔았다.
내가 「세루」상회에 있을 때다. l930년께인데 그때부터 자동차판매 경쟁의 방법은 각양각색이었다. 나는 적극적인 판매 선전방법으로 「캐러번」이라 하여 각종 차를 가지고 지방순회를 했던 기억이 지금도 안 잊혀 진다.
일종의 「카·퍼레이드」였다. 「실크」모자를 쓴 양코배기(미국인) 선교사가 「헤들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면 괴물 나타났다고 달아나거나 쇳덩이가 굴러온다며 지방실정이었으니 「카·퍼테이드」는 사실상 「서커스」구경이나 다름없었다.
그 무렵 우리 나라 사람으로는 박용운씨가 경성자동차 판매회사라는 것을 1백만원의 자본금으로 시작했으니 아마 그가 판매업은 처음 한 것으로 봐도 옳을 것이다. 그때 판매업에 종사한 직원은 우리나라사람이 대여섯 명 있었지만 자기자금으로 시작한 사람은 없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