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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억류 45일(상)|제55 동성호 선원 장일남씨 수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제55 동성호 선원들의 45일 동안 소련에서의 피납 생활을 적은 장일남씨의 수기가 입수되었다. 해방 후 처음으로 경험한 소련 땅에서의 수용소생활을 폭로하는 이 수기는 선원들을 인수해온 일본해상보안청 순시선 「에리모」13호의 사무장(함장) 「오가사하라」씨와 장씨의 협조로 입수되어 「구시로」∼동경경유 서울로 승계된 것이다.

<신나는 명태잡이>
우리들의 시계는 5월31일 하오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부산을 떠난 지 꼭10일-앞으로 『열흘만 더 고생하면 만선(만선)귀향이로구나』고 생각하니 그물을 당겨 올리는 손길도 한결 가벼웠다.
한탕만 더 올리곤 점심을 들 참이었다. 점심이라야 부산서 가져온 굳은 빵이지만 명태를 건져 올리는 재미로 점심은 빵으로 가볍게 먹곤 했다.
막 그물을 올리려 하는데 한 자락 파도가 밀치면서 수상쩍은 쾌속 함이 쏜살같이 우리 쪽으로 접근해 오는 것이었다. 가슴이 섬뜩했지만 짐짓 태연하게 그물질을 계속하면서 다가오는 함정을 쳐다보니 「낫과 망치」(「소련」국장)가 연통에 새겨져 있지 않은가. 소련경비함이 틀림없었다. 501호함이라고 선수에 새겨져 있었다. 조타실에선 이미 이를 눈치챘는지 서서히 속력을 내기 시작했지만 소련 함은 어느덧 우리 동성55호 곁으로 바짝 다가서면서 승무원들이 우리 쪽을 향해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댔다.

<무작정 북상이탈>
구명대를 입으며 함포의 총구를 우리 쪽으로 겨누는 등 전투태세를 벌이는 것을 보자 『이젠 끝장이구나』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우리가 속력을 내는 듯 싶자 소련501함에선 신호탄과 함께 몇 발의 총탄이 「드르륵」 거리면서 동성호의 정지를 명했다. 사실 동성호는 제주도로 조업하러 나간 다고 적당히 보고하고 명태어장을 찾아 무작정 북양으로 나섰던 터라 『모든 것이 들통났구나』하는 생각에 와락 겁이 치밀었다. 「캄차카」의 명태를 부산부두에 부린다는 부푼 꿈도 산산조각이 나는 듯 싶었다.
동성56호는 5백m 떨어진 채 뒷걸음질을 쳤다. 드디어 소련 함에서 요란한 함포가 터졌다. 20분이 흘렀다. 동성55호는 거친 해상에서 정지해 버렸다. 멀리 「숨슈」도의 산록에 희뿌연 눈발이 눈에 들어왔다. 동성55호가 서자 소련경비함은 배를 바짝 붙이려 했으나 파도에 떠밀려 네 번쯤 선체끼리 부딪쳐 우리 배의 선미가 박살나는 소리가 「우지끈」거릴 뿐 30분이 지났는데도 소련 함은 안간힘만 썼다.

<소수 병들 갑판에>
이윽고 소련수병차림의 승무원이 앞에총 자세로 동성55호의 갑만에 우르르 기어들면서 한쪽으로 몰아세웠다. 우리 선원(15명)은 일제히 작업복 또는 우비를 입은 그대로 무조건 손이 발이 되게 두손을 싹싹 빌면서 애원을 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 그저 비는 수밖에 없었다. 소련경비병들은 선장실과 무전실에 뛰어들어 모든 통신을 억제하고 선원들은 선미에 모이라고 명령했다.
바닷물이 갑판에 올라 선원들은 추위와 공포에 질려 오들오들 떨면서 쪼그리고 앉았다. 우리 선원 중 7명은 북양어로에 경험이 있었지만 나머지 선원들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수산청 규정에 따라 어군탐지기나 「레이다」장치가 없는 1백t급 이하는 북양 진출을 막고 있기 때문에 우리(92t급)는 제주도를 간다하고 살짝 빠져 나오느라 7명의 북양경험 선원들로 바꿔 태우고 나선 것이다.

<구원의 손 멀어져>
「캄차카」반도 끝에 있는 「파라무실」도의 「세베로크릴스크」에 닿은 것은 어둠이 깔린 뒤였다. 동성56호가 가까스로 현장을 빠져나갔으니 우리의 위급 상황을 본국에 타전하리라 믿긴 했지만 이미 소련 영에 강제 납치되어 상륙할 판이니 이젠 희망이 없다는 생각으로 우리들은 낙심천만이었다. 인근엔 동성56호 외에 지남 301호 (제동산업) 가 조업 중이어서 우리 소식은 금방 한국으로 들어가리라 믿었다.
「파라무실」도에 배가 들어오자 15명의 선원을 선미에 몰아붙인 채 서너 명의 경비병이 총구를 겨누고 노려볼 뿐 우리를 어떻게 한다는 아무런 「액션」도 없어 더욱 초조했다. 밤새껏 오한과 허기에 지쳐 새우잠을 자는둥 마는둥 먼동이 밝았다.
장교복 차림의 사나이가 한국인 통역관을 데리고 나왔다.
선장과 갑판장을 따로 불러내어 어디론지 데려가고 나머지 선원들은 유치장 같은 곳으로 끌고 갔다. 먹을 것도 주지 않고 우리가 가져간 빵 조각을 그대로 먹게 하는 것을 보니 인정사정이 없고, 매정스러워 보이기만 했다. 여기서부터 악몽 같은 억류생활이 시작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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